인드라의 그물 Nobless Club 12
문형진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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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고 들었는데, 정작 도입부를 읽으며 떠올린 것은 인터넷과 게임이었다. 단순히 모뎀이라거나 단말기라거나 하는 용어가 튀어나와서만은 아니다.

주인공 칼키는 처음에 아기로 등장하지만 순식간에 성인으로 변해버린다. 사실상 그의 기억은 이 시점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그에 비해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스킬을 다 갖고 있다. 이것은 마치 게임 캐릭터가 이미 자란 상태에서 게임속 세계로 던져지는 순간을 연상시켰다.

뒤로 가면서 칼키가 새로운 스킬을 하나씩 익히고 레벨업하는 과정을 보며 이런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오토마우스라도 써서 레벨업을 했는지, 아니면 폐인 처럼 잠도 안 자고 게임만 했는지, 칼키는 짧은 시간에 최강의 캐릭터로 성장한다.

그리고 칼키와 그의 연인(들)이 모든 미션을 클리어하는 순간 자신들의 육체는 단지 '아바타'일 뿐이란 것을 깨닫는다. 유저의 취향과 욕망을 반영해 선택된 캐릭터들인 것이다.

한편, 게임이 끝나자 붕괴된 세계는 '리셋'된다. 그리고 판타지 게임을 클리어한 유저는 이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넘어간다.

주인공의 '깨달음'이란 결국, 모든 퀘스트가 끝나고, 만렙을 달성하고, 모든 스킬을 1랭까지 다 올려서 더이상 할 게 없어진 게임을 리셋해버리는 순간이다.

세계가 붕괴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의 게임이 끝나면 다른 게임으로 넘어가면 되고 캐릭터를 삭제해도 언제든 다시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 수 있으니까.

불교 용어와 스킬 이름들도 그냥 키워드나 명령어일 뿐이고, 이 책은 차라리 게임 소설에 가까워 보인다. 종종 칼키가 자신의 의식이 육체 및 세계와 분리된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이것은 유저가 게임 밖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대략, 노블레스클럽의 책을 읽으며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건 데스노블 이후 오랜만인 것 같다. 나름대로 시도는 나쁘지 않았고, 기존 판타지와 차별화하기 위해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려 애쓴 흔적도 보인다. 그런데, 약간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랄까.

아무튼, 불교의 탈(?)을 쓰긴 했지만, 거창하게 심오하거나 철학적인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용도 그닥 어렵지 않으니 가볍게 읽어도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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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걷다 - 2009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 Nobless Club 11
김정률 외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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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경계소설을 표방하며 출발한 노블레스클럽은 첫 작품 <얼음나무 숲>부터 <오우 다섯시의 외계인>까지 1년여동안 모두 9작품 10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리고 마침내 1주년을 맞는 노블레스클럽이 야심차게 준비한 열한 번째 책 <꿈을 걷다>. 이 책은 전민희, 좌백, 하지은 등 유명 장르작가 12명의 작품을 엮은 단편집이다.

국내 장르소설 시장에서 경계소설이라는 용어도 생소한 면이 있지만, 단편집도 그닥 흔치 않다. 환상 문학 웹진 『거울』같은 곳에서나 꾸준히 작품집을 발표하지 주류 출판 시장에서 단편집, 그것도 장르 소설 단편집은 어느 정도 모험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표지 안에 묶여 있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상당히 다양하다.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무협풍의 이야기에서부터 독특한 세계관의 판타지까지, 웃음을 터뜨리는 유쾌한 이야기부터 비극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까지. 개인적으로 SF라고 부를만한 작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지만 말이다.

너무 다양하고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보니 쭉 읽다보면 다소 번잡스러울 때도 있다.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냥 여러 권의 책을 붙여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의 제목이 "꿈을 걷다"인데 이건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 고른 제목도 아니고 그 중에 이 말이 어울릴 만한 이야기도 별로 없다.

 

열세 편의 이야기 중에서 "꿈을 걷다"라는 제목과 그래도 엮어 볼만한 작품으로는 하지은 작가의 <앵무새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이다>를 꼽고 싶다. 이 책에는 전체적으로 비극 혹은 공포 분위기의 이야기가 많은데, <앵무새...>는 웃음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다. 다소 과장되고 억지스러우면서 그것까지도 웃음의 요소가 된다. 그냥 가볍게 읽을 수도 있지만, 문장들을 음미하다 보면 은근히 뼈가 있는 웃음이다. 꿈을 꾼다는 것, 꿈을 이룬다는 것, 혹은 꿈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

<얼음나무 숲>의 하지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노블레스클럽에서 <라크리모사>를 출간한 바 있는 윤현승 작가도 이번 작품집에 참여했다. 그는 이번에도 <인카운터>에서 또한번 반전의 묘미를 보여준다.

무협소설로 유명한 좌백 작가는 <느미에르의 새벽>으로 새로운 분위기의 작품을 선보였다. 다양한 이종족, 기계 생명체와 그 변이과정, 금속성의 삭막한 배경 등은 문득 일본 만화 이트맨을 떠올리게 했다.

한상운 작가의 <거름 구덩이>는 처음에는 무협소설인가 했는데, 뒤로 가면서 좀비 소설을 보는 기분이었다.

12명의 작가들 중 유일하게 진산 작가는 <두 왕자와 시인 이야기>, <그릇과 시인 이야기> 두 편을 실었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찌보면 진부할 수도 있는 소재들을 섬세하게 엮어내며 그 안에 인생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아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전민희 작가의 <11월 밤의 이야기>도 "꿈을 걷다"라는 제목에 어울릴 법하다. <앵무새...>에서와는 다른 의미의 꿈을 이용해, 세심한 설정과 잘 짜여진 액자구조 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책을 받고 나서 나중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작품의 순서. 작가 이름의 가나다 순이다. 작품의 주제나 분위기와 상관 없이, 그냥 가나다 순으로 나열한 모양이다. 그래서 더 책이 한 권의 책같지 않고 따로 노는 느낌이었던 걸까.

어쨌든, 그러니 이번 책은 작품의 순서나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골라 읽어도 상관 없어 보인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부터, 혹은 이전에는 가까이 하지 않았던 새로운 장르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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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 2010-03-1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백님, 이번에 교보 북로그에 새 무협 연재 시작하셨더라구요. 혹시 보셨어요? 기대중입니다.
 
오후 다섯시의 외계인 Nobless Club 10
김이환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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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의 외계인(이하 '오다외')는 이제까지 읽은 노블레스클럽의 책들 중에서 가장 유쾌한 이야기였다. 최근 몇 년 간 이렇게 웃으면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오다외는 현실과 환상이 겹쳐지는 공간, 지구인과 외계인이 공존하는 세계를 통해 일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준다.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다채롭지만 복잡하지 않고, 심오하지만 현학적이지 않다.

이야기는 고달픈 일상을 살아가는 어느 휴학생과 길잃은 외계인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누가 외계인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사람들과 섞이지 못 하고 겉도는 성우와 달리 정작 외계인인 용관은 지구인들과 의외로(!) 잘 어울린다. 순식간에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인기폭발이다.

그에 비해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보이는 사장님과 사모님이 더 외계인 같고,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하는 주인공과 역시 그를 따돌리는 주위 사람들은 서로에게 외계인같은 존재일 뿐이다. 지구에서 태어나 지구에서 자랐지만 외계인 취급을 받는 지구인과, 지구인들 틈에 섞여 조금의 의심도 없이 - 심지어 다른 종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 어울리고 있는 외계인들.

이것은 길잃은 외계인이 분실물을 찾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이지만, 정작 지구인이면서 외계인 취급을 받으며 방황하던 한 청년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지구로 여행온 외계인들인 게 아닐까. 친구를 찾아,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어딘가에 있을 집으로 돌아갈 문을 찾아 헤매는 외계인.

그러니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하자. 매번 성우같이 친절한 지구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테니까.

 

오다외를 그냥 즐겁고 가벼운 이야기로 읽을 수도, 거창한 철학이나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구인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 외계인의 손에서 온갖 기능의 선물로 바뀌는 것처럼 책이란 것도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도 하는 신비한 물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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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새 - 상 - 나무를 죽이는 화랑 Nobless Club 8
김근우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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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새는 노블레스클럽에서는 드물게 두 권으로 나뉘어 나왔고, 각권의 분량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단숨에 읽어버렸다는 독자도 있는 모양이던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읽는 게 느린데, 어째서인지 평소보다도 더 느리게 읽고 있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 남자와 한 소녀가 있다. 화랑 바오 가람, 그리고 피리새. 각자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으면서 또한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두 존재. 사랑이니 우정이니 하는 따위의 인간적인 단순한 말로 규정할 수 없는 이들의 관계는 절박하고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과연 인생을 살면서 진정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기 존재를 인정해주는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않기에, 심지어 혈연이라는 운명적이고 긴밀한 관계로 엮여 있으면서도 세상의 온갖 것들에 얽매여 서로 의심하고 대립하고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고 있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굳이 책속의 인간들만이 아니더라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렇다고 저 둘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재미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개그 콤비 마휼과 서다함에서부터 지나가는 길에 만난 남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로 인해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운명.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화두중 하나가 운명이다. 운명이 뭐냐,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느냐, 운명에 휘둘리는 게 아니냐, 그런 따위의 말은 필요 없지 않을까. 어차피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사람들은 그냥 뭉뚱그려서 운명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갖다 붙인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인생의 매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닐까. 가람과 피리새는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그 시간들을 살았다. 그러기에 자기 입으로 "운명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기에 미련 없이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서양의 드래곤이 아닌 동양의 이무기와 용에서부터, 삼국 시대를 연상시키는 국제 정세와 정치 구도, 가람이니 하늬니 하는 우리말 이름, 주몽이나 처용 같은 익숙한 단어들도 만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문화와 우리 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책이 신선했던 것은 단순히 설정 때문만은 아닌 듯 보인다. 그저 몇 개의 단어와 설정을 끌어오기만 한다고 소설이 나오는 것은 아닐테니까.

아무리 번역을 잘 한다고 해도 외국 소설을 번역해 놓으면 어딘가 어색한 데가 있다. 심지어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그 이상으로 부자연스러운 경우까지 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오타로 의심되는 몇몇 문장을 제외하고) 각종 이름씨와 꾸밈씨, 풀이말로 채워진 문장 한 줄 한 줄, 나아가 인물들의 미묘한 대사에서 우리말 소설에만 있을 것 같은 정감과 섬세함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노블레스클럽에서 얼음나무 숲 이후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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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콘택트 Nobless Club 7
박치형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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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감각이라는 게 재미있는 게, 종종 직접적인 자극이 없어도 마치 그것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는 점이다. 음악이 없어도 음악이 들리는 것 같고, 영상이 없어도 눈앞에 구체적인 모습들이 보이는 것 같다. 독서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단지 눈으로 활자를 쫓을 뿐이지만 머릿속에서는 오감이 작동하고 있다.

감각이 막혀버린 바닷속 환경에서 단지 소나라는 장치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만이 허락되는 잠수함. 그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상대방의 감각을 읽고 먼저 행동하는 자는 그만큼 살아남을 확률도 높아진다.

그런 점에서 해저의 환경과 잠수함들끼리의 전투를 다룬 로스트 콘택트는 여느 소설 이상으로 읽는 이의 상상력과 오감을 자극한다. 빈틈을 주지 않는 빠른 전개속에 묘사도 적은 편이지만 굳이 그걸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매상황 인물들의 감각과 생각이 전해지는 듯 하다.

노블레스클럽의 일곱번째 작품인 로스트 콘택트. 지금껏 다양한 시도와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인 노블레스클럽이 이번에도 또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다. 기존에 볼테르의 시계를 비롯해 독자의 시각에 따라서는 현시국과 연결될 수 있는 작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로스트 콘택트는 이 점이 특히 더 직접적이다.

자원 고갈 문제와 그 대안인 메탄 하이드레이트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 영토 문제, 국제 관계, 나아가 현시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까지 까발리고 있다. 마치 심해에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우리의 눈과 귀를 열고 주변을 둘러 보라고 말하고 있다.

다소 노골적이고 편향된 시각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이 책의 존재 가치를 더욱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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