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새 - 상 - 나무를 죽이는 화랑 Nobless Club 8
김근우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피리새는 노블레스클럽에서는 드물게 두 권으로 나뉘어 나왔고, 각권의 분량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단숨에 읽어버렸다는 독자도 있는 모양이던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읽는 게 느린데, 어째서인지 평소보다도 더 느리게 읽고 있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 남자와 한 소녀가 있다. 화랑 바오 가람, 그리고 피리새. 각자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으면서 또한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두 존재. 사랑이니 우정이니 하는 따위의 인간적인 단순한 말로 규정할 수 없는 이들의 관계는 절박하고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과연 인생을 살면서 진정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기 존재를 인정해주는 상대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않기에, 심지어 혈연이라는 운명적이고 긴밀한 관계로 엮여 있으면서도 세상의 온갖 것들에 얽매여 서로 의심하고 대립하고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고 있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굳이 책속의 인간들만이 아니더라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렇다고 저 둘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재미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개그 콤비 마휼과 서다함에서부터 지나가는 길에 만난 남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로 인해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운명.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화두중 하나가 운명이다. 운명이 뭐냐,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느냐, 운명에 휘둘리는 게 아니냐, 그런 따위의 말은 필요 없지 않을까. 어차피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에 사람들은 그냥 뭉뚱그려서 운명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갖다 붙인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인생의 매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닐까. 가람과 피리새는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그 시간들을 살았다. 그러기에 자기 입으로 "운명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선택을 인정하기에 미련 없이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서양의 드래곤이 아닌 동양의 이무기와 용에서부터, 삼국 시대를 연상시키는 국제 정세와 정치 구도, 가람이니 하늬니 하는 우리말 이름, 주몽이나 처용 같은 익숙한 단어들도 만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문화와 우리 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책이 신선했던 것은 단순히 설정 때문만은 아닌 듯 보인다. 그저 몇 개의 단어와 설정을 끌어오기만 한다고 소설이 나오는 것은 아닐테니까.

아무리 번역을 잘 한다고 해도 외국 소설을 번역해 놓으면 어딘가 어색한 데가 있다. 심지어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여진 책이라고 해도 그 이상으로 부자연스러운 경우까지 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오타로 의심되는 몇몇 문장을 제외하고) 각종 이름씨와 꾸밈씨, 풀이말로 채워진 문장 한 줄 한 줄, 나아가 인물들의 미묘한 대사에서 우리말 소설에만 있을 것 같은 정감과 섬세함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노블레스클럽에서 얼음나무 숲 이후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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