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도시 - 하 - Arche-type(절판 예정)
정지원(김지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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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권에 이어 이번에는 네 편의 이야기를 엮었다. 다시 만난 반가운(?) 얼굴도 있고,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도 있다. 배경은 여전히 거대 도시 캐피탈. 전편에 비해 이야기는 더욱 퇴폐적이고 잔인하고 기괴해졌다.

각각의 이야기가 서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여전히 사랑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사회통념상 부적절한 관계, 한 사람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모든 이를 사랑하며 원수마저 끌어안는 보편적 사랑까지.

<바벨의 도시>는 언제나 천사와 악마, 사후세계와 구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들은 모두 죽음과 이어져있다. 누군가는 죽고, 그의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 보내진다. 어떤 영혼은 천사나 악마가 되기도 한다. 천벌이든 구원이든 결국 죽음이 전제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죽음이 흘러내리건만 어째서인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이 느껴진다. 사랑도 야망도 미움도 고뇌도 모두 살아 있을 때 하라고.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 없다고.

남자는 천사가 되어 돌아왔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나비의 꿈) 여자는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지만 정작 천국보다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야망이 더 강했다. 심지어 살아서 성자가 되려 할 만큼. (오를레앙의 처녀) 소년은 지옥같은 현실을 저주했지만 그러한 고민과 고뇌조차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knocking on Heaven's door)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죽음을 맞았지만 영혼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천국으로 떠났다. (너와 나의 천국) 죽었으니 이제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마지막 이야기에서 센의 과거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다. 굳이 센과 세이린만이 아니더라도 좀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역시나 작가의 후기에서 못다한 이야기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나마 하권이 나와준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긴 한데, 이래저래 아쉬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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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도시 - 상 - Arche-type(절판 예정)
정지원(김지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천사와 악마, 뱀파이어와 사이보그, 환상과 기계 문명이 공존한다. 그 세계는 낯설다 못 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이 책에 담긴 여섯개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떼어놓고 읽어도 무방할 만큼 독립된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각각의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그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 그것은 사랑이다. 가장 흔한 이야기이면서 가장 절실한 것이기도 하다.

거대 도시 캐피탈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과 온갖 이종족들의 모습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하고 비윤리적이기까지 하다. 악마를 사랑하는 천사에서부터 동성애자까지, 그들은 사회 통념이나 심지어 선악 구분 조차도 뛰어 넘어 사랑 그 자체에 충실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 앞에 장미빛 미래나 거창한 희망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거룩한 희생이나 감미로운 노래로 치장할 만큼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관 없지 않을까. 어차피 빛과 어둠, 선과 악, 희망과 절망,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 조차 모호해진 그 세계에서 그들이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단지, 자신 안의 순수한 감정에 충실할 뿐.

기괴하다고 표현했지만, 순식간에 한 권을 다 읽어버릴 만큼 몰입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책 속의 세계가 현실을 묘하게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선행과 희생에 대한 보상이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식의 해피엔딩은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얘기다. 정작 현실은 어느 판타지 소설보다도 판타스틱하고 불합리와 부조리가 판친다. 심지어 사랑까지도 남의 눈을 의식하고 온갖 제도와 관습에 얾매인다. 오히려 종종 순수한 사랑이 비난받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빛조차 사라진 세계에서 홀로 피는 꽃 처럼, 오직 그들만의 사랑, 그들만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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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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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다지 활발한 시장이라고는 못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종종 드라마CD가 제작 된다. 거의 매달 그것들을 구입해 듣곤 하는 것은 이제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나의 즐거운 취미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다.

최근의 드라마CD 시장은 라디오가 대세이던 20세기 중반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내가 즐겨 듣곤 하는 드라마CD의 주구매층은 20대 전후의 젊은 세대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영상물에 익숙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때때로 드라마CD를 "듣는 만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만화라는 건 그림인데 드라마CD는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소리, 즉, 청각으로 만화를 본다? 언뜻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렇게 소리로 만화를 즐긴다.

말하자면, 모델을 안 보고 목소리만 듣고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피암보는 "듣는 만화"를 보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디오드라마로 만들면 참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적절한 소재다.

즐겨 듣는 드라마CD 중에 <더 자라(The Jara)>라는 시리즈물이 있다. 내용의 대부분은 단순히 성우가 1부터 200까지 숫자를 세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 남자 주인공은 가상의 여성을 상대로 대화를 한다. 여성의 목소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이 여성이 누구인지, 남자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전적으로 듣는 이의 상상에 달렸다. 이 여성은 듣는 이 자신일 수도 있고 혹은 또다른 가상의 존재일 수도 있다. 청자는 자유롭게 자신만의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얼굴 없는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우리의 주인공 피암보도 뭐가 현실이고 뭐가 환상인지 모르는 모호한 세계로 점점 빠져간다. 샤르부크 부인이 들려주는 신비한 이야기들, 도시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사건들, 마약, 살인, 음모, 질투... 이런 것들이 뒤섞여 돌아간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피암보 자신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드라마CD가 끝나면 잠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듯이, 피암보도 결국은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어지럽게 널려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맞아 들어가며 진실을 드러내 보인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은 그렇게 잘 연출된 공연처럼 모든 요소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더 자라>의 목소리 없는 여주인공처럼 적당한 여백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부분은 독자가 취향대로 채우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된다.

피암보나 다른 화가들이 샤르부크 부인의 외모를 정확히 묘사하려고 혈안이 되는 게 솔직히 좀 답답했다. 샤르부크 부인, 아니, 루시어가 진정 원했던 게 자신의 얼굴을 점 하나 털 하나까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었을까. 루시어가 자기 생각을 설명해도 물론 피암보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 했지만.


다음 주면 또 한 편의 새로운 드라마CD가 발매될 예정이다. 이번엔 또 어떤 환상을 보여줄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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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인의 귀향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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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노벨 보다도 작은 사이즈의 조그만 책. 이 책을 받아 들고 "이렇게 작을 줄 몰랐다"고 말하는 독자도 있더라지. 물론, 작다고 내용까지 작으란 법은 없다.

인공지능, 로봇, 전자공학 같은 기술적인 설정위에 종교, 인문학, 철학을 끌어와 주무르는 걸 보고 있자면 "역시 젤라즈니"라는 감탄 밖에 안 나온다.

인간이 몸을 만들어 주고, 지식을 전해주고, 마음을 담아준 기계 행맨. 단순히 기계가 인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의 차원을 넘어 그런 존재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 - 앞부분에서는 주로 공포로 묘사 되었지만 - 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는 문제는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행맨의 자유의지를 인정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그저 인간을 따라하기 보다 스스로 고독을 택하고 다시 별들 사이로 떠난 행맨의 선택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주로 나가 새로운 것들을 보고, 인간이 가지 못 한 세계에 발을 딛겠지. 그는 이미 여러가지 의미로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별을 보고 신세계를 꿈꾸는 이에게 지상은 그저 우주의 티끌중 하나일 뿐이겠지.

수십 년간 태양계를 가로질러 길고 긴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보이저호나, 우주미아가 될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탐사선 하야부시 같은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어떤 감동과 함께 부러움 마저 느껴진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고독한 여행, 고난을 이겨낸 의지와 용기. 그것이 순전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감정이입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기계에 마음이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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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히메 1
타카노 와타루 지음, 조은경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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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히메는 가상의 세계,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사극 분위기에 전국시대 같은 혼란한 시대를 다루고 있다. 라이트노벨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라이트노벨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인듯 하다. 초능력이나 마법을 써가면서 능력자배틀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군대의 대립과 전투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보다 뒤에서 벌어지는 정치 싸움에 더 비중을 둔 느낌이다. 화려하고 거창한 대결을 기대한다면 좀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읽기 어렵다거나 한 건 아니다. 일단, 주인공이 어린 소녀이고 그 아이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래서 딱딱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의외로 쉽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다.

제목의 나나히메는 일곱 공주를 뜻한다. 화자는 그중 마지막인 일곱번째 공주이고, 이들 일곱명의 공주를 중심으로 일곱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것이 기본 설정이다.

실상 상황을 주도하는 인물은 어린 공주라기 보다 토엘 타우와 텐 후오우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걸출한 영웅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이 이 책의 재미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기 보다 종종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밖에도 카라를 제외한 다른 공주들의 등장이나 여러 주변 인물들도 흥미롭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 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활약도 놓칠 수 없으리라.

가끔 읽기 불편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전체적인 번역도 나쁘지 않았다. 고유명사에 해당되는 한자어의 일본식 독음을 거의 그대로 옮겨와 어감을 살려준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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