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녹슨달
하지은 지음 / 드림노블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의 이름을 보고 작품을 고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전작들과 비교하면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의 작품들이 일정한 테마를 담고 있다고 느낀다면 더더욱.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다뤘던 〈얼음나무 숲〉, 소설가와 독자가 주인공인 〈모래선혈〉의 공통된 테마는 예술. 전작인 〈보이드씨의 기묘한 저택〉은 예술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미술의 향기가 느껴졌던 지라 이번 작품이 화가들의 이야기라고 들었을 때 "역시나" 싶었다.
〈얼음나무 숲〉이나 〈모래선혈〉에서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그를 이해해주는 존재 - 청중, 독자 - 가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에 비해 〈녹슨달〉은 화가들에게 집중하고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모습도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화가들의 내면과 그들의 공방에 무게를 두고 있고 갤러리는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에 그친다.
〈녹슨달〉의 배경이 언제 어디라고 특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중세풍으로 그려진다. 단순히 작가가 중세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는 화가들과 유럽문명의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라는 배경은 그 자체로 극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본문에서도 "신"에 맞서려는 화가들의 저항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의 "신"은 단순히 성스럽고 초자연적인 절대자로서의 신이 아니다. 이미 세속화된 종교안에서 "신"은 신분, 관습, 제도, 권력... 개인의 삶을 옭아매는 온갖 것들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예술가들에게는 더더욱 괴로운 족쇄다.
파도, 시세로, 레오나드를 중심으로 하는 화가들 그리고 뒤벨, 사라사, 왕세자비 등 귀족들. 그들을 둘러싸고 얽혀가는 꿈과 좌절, 애정과 욕망. 모두 같은 인간이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신분과 지위가 다르다.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욕망을 분출할 수 없었던 것도, 비극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도 바로 그 신분과 관습 같은 "신"이 따라다닌다.
심지어 파도와 레오나드, 시세로도 스승의 그림을 파괴해 버림으로써 "신"의 공범이 된다. 예술가들이 권력에 굴복해 자신과 동료 예술가를 검열하는 또다른 비극이 일어난다. 다들 자신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큰소리 치지만 결국은 그렇게 모사나 하고 "신"이 요구하는 종교화나 그릴 뿐이다. 한때 반짝이던 천재 화가들도 "신"안에 갇힌 채 하나둘 무너져 간다.
주인공 화가의 1인칭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도 하지만 이 녀석이 좀 찌질한 성격이다보니 표현이 유치하고 직설적인 면도 있다. 예술한다고 떠벌이지만 정작 녀석의 삶은 피와 침과 땀으로 범벅되었다. 그래서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짜증나기도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재능은 있는데 성질은 더러운 그런 화가.
공방에 들어가기 전, 처음에 파도는 흙으로 그림을 그렸다. 고상한 화가들의 관점에서 그것은 그림이라고도 할 수 없는 유치한 장난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이야 말로 파도의 영혼이 가장 자유롭고 순수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먼지처럼 초라하고 바람처럼 허무하면서 그만큼 순수하기도 하다. 흙이야 말로 파도라는 예술가의 인생에 적합한 재료, 아니 인생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