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슈퍼맨 : 레드 선 ㅣ 시공그래픽노블
마크 밀러 외 지음, 최원서 옮김 / 시공사(만화)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여러 SF, 판타지 등에서 익숙한 상황이나 서로의 입장을 뒤집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흥미와 재밋거리를 준다. 나아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을 뒤집어 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대상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지난 세기 미국식 영웅주의의 상징으로 군림해왔던 슈퍼맨. 그런 슈퍼맨이 (구)소련의 아들로 키워져 소련의 영웅이 되었다면? 이 기발하고 발칙한 상상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슈퍼맨: 레드 선>. 스탈린을 따르는 슈퍼맨, 슈퍼맨이 없는 미국, 과연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소련에서 자랐어도 슈퍼맨은 여전히 슈퍼맨이었다.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날아다니고. 심지어 소련의 적국인 미국의 시민들이 위험에 빠지면 똑같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선의에서 시작했으나 그 결과는 조금 달라졌다.
슈퍼맨은 정의의 초인이었고 그의 너무 강력한 힘에는 조금의 "만약에..."도 허용되어서는 안 됐다. 그랬다가는 그의 정의의 바벨탑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스티스리그에서 슈퍼맨이 했던 대사처럼 그는 종이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살아왔다. 슈퍼맨이 입김만 불어도 모든 것이 날아간다. 제대로 힘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의 "정의"에 대들 수 있는 이들은 정신병자나 슈퍼빌런들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만약에..."를 다룬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정복자 슈퍼맨, 지구를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독재자 슈퍼맨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나..." 였다.
하지만 결말은 확실히 충격이었다. 미국의 상징 슈퍼맨을 스탈린주의자로 만든 것 이상으로 외계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슈퍼맨의 정체성을 뒤집는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슈퍼맨과 함께 로이스 레인과 렉스 루터 뿐만 아니라 배트맨, 원더우먼, 그린 랜턴 같은 익숙한 캐릭터들이 닮은 듯 다른 모습으로 붉은 슈퍼맨의 우주를 살고 있었다. 단순한 패러디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모두 적절하게 어우러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책에 등장하는 슈퍼맨도 여전히 슈퍼맨이다. 하지만, 똑같이 정의와 이상을 외쳐도 조그만 생각의 차이가 어떻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정의의 초인이 어떻게 독재자가 될 수 있는지를.
슈퍼맨을 보며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저런 힘을 갖고도 결코 세상을 구하지는 못 한다고. 위험에 빠진 시민들 몇몇을 구해준다고 당장 전쟁과 기아 같은 지구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사고와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레드 선의 슈퍼맨은 권력자, 독재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슈퍼맨을 꿈꾸고 있나. 소위 말하는, "백마탄 초인"이 나타나 이 상황을 모두 정리해주길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는가. 그때 우리는 진정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