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일 센티미터 ㅣ 클레이키위 청소년문학 2
고은영 지음, 창산 그림 / 클레이키위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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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않는 은행나무처럼
- 고은영, <노란 일 센티미터>를 읽고

검은 양복을 옷걸이에 걸었다. 소매 끝에서 향냄새가 나는 듯하다. 손으로 몇 번을 털어도 향이 남아있었다. 갑자기 떠나신 작은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온 밤이었다. 서울 길을 차로 운전해서 다녀왔으니 피곤할 법도 한데 왠지 잠이 오진 않았다. 다시 홀로 덩그러니 포항 집에 돌아오니 어쩐지 마음이 먹먹했다. 평소 좋아하던 독서와 글을 쓰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여 읽다만 책 한 권을 다시 펼쳐 읽었다.

노란 은행잎이 쏟아지는 길을 아이 하나가 혼자 걸어간다. 고은영 작가의 소설, <노란 일 센티미터> 표지다. "나는 아직도 검은 옷만 봐도 옷에서 냄새가 느껴져. 장례식 냄새." 책 속 문구에 고개가 저절로 옷걸이 쪽으로 돌아갔다. 주인공 꽃샘이는 아빠를 잃었고, 정우는 엄마를 잃었다. 책 속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위로를 얻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부고장. 결혼하기 전에는 명절 때마다 뵈었던 작은 아버지였다. 최근 몸이 급작스럽게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누워계신 소식은 들었으나, 아직 찾아뵙지는 못하고 있었다. 작별 인사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생각나 마음이 아려왔다.

책 속에서도 아프다는 건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엄마가 아픈 건 헤어질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거라고들 했지만, 막상 엄마를 보내고 나니 그게 무슨 준비였는지 모르겠더라고. 그저 안 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만일 시간이 있었더라도 우리는 끝내 헤어질 준비를 완벽히 했을까.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연습으로라도 익숙해지면 좋으련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장례식장에 두고 출근을 위해 돌아오는 길, 빈소 앞에서 목놓아 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였다. 아버지는 고3 때 할아버지를 여의셨다. 나는 얼굴도 뵌 적 없는 할아버지다. 너무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보낸 소년이, 이번엔 형제를 먼저 떠나보냈다. 책 속에선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진리가 딱 하나 있는데,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이라고. 다만 우리는 그걸 조금 일찍, 너는 너무 일찍 겪었을 뿐이라고. 그 시절 아버지 곁에도 그런 말을 건네 준 누군가가 있었으면 일찍 철드지 않아도 됐을텐데. 책 속 정우와 꽃샘이도 또래와 비교하면 일찍 철이 들었듯 아버지 또한 가장의 무게를 일찍 짊어지셨다.

전학을 갔다가 돌아온 정우는 박정우에서 차정우로 성이 바뀌어 있었다. 그 대목에서 오래 잊고 지낸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꽃샘이와 정우와 마찬가지로 중학교 때 친구였다. 학교를 중간에 관두고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친구도 성이 바뀌어 있었다. 그때는 의아해했지만 짐작한 바가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묻거나 내색하진 않았지만, 한동안 그 애를 부를 때마다 입이 어색하게 머뭇거렸다.

소설 속 아이는 이렇게 깨닫는다. 갑자기 정우가 차정우로 변한 게 아니라, 정우를 바라보는 내가 변한 것이라고. 그 문장을 읽고서야 나를 다시 보았다. 친구는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성 하나를 두고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민을 하는 나였다. 성을 빼고 평소처럼 불러 주면 될 텐데도 성이 바뀌었다고 호칭을 고민하다니. 어색함을 감지했을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같은 은행잎이 누군가에게는 예쁘게, 다른 누군가에게는 치워야 할 쓰레기로 보일 수 있다는 문장과 은행잎은 은행잎일 뿐이고, 어떤 세상의 주민이 될지는 자기가 고르는 거라는 문장이 위로를 건넸다. 슬픔이 드리운 세상 속에서 오래 머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로 했다. 어떤 세상의 주민이 될지는 내가 고른 거라는 말이 와닿았다. 그렇다고 애써 괜찮아지려 서두르지는 않으련다. 은행나무 또한 서두르지 않는다. 봄에 연둣빛 잎을 틔우고 여름의 비바람을 묵묵히 견딘 뒤에야 가을이 되어 가장 찬란한 노란빛을 보여 주기에. 은행나무가 조금 늦어도, 많이 흔들려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책 속 문장들을 통해 계속해서 위로를 얻었다.

《노란 일 센티미터》는 청소년 소설이지만 어른이 읽기에도 좋다. 상실 앞에서는 어른도 아이와 다르지 않다. 전학 간 친구, 떠나보낸 반려동물, 예고 없는 부고. 크기는 달라도 잃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처음 겪는 일이다. 책은 모두에게 위로를 건네고 위안의 손길을 내민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된다. 무언가를 잃고 먹먹한 하루를 버티는 이에게, 그런 이들의 곁을 지키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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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검은 옷만 봐도 옷에서 냄새가 느껴져. 장례식 냄새. 향냄새랑 음식 냄새, 국화꽃 냄새가 섞여 힘이 쭉 빠지게 하는 그 냄새. 지금도 매일 엄마를 그리워하는데 친구들은 장례식이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엄마 이야기냐고 엄마 이야기를 그만하래. 엄마는 돌아가셔도 계속 엄마인데, 엄마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게 말이 돼?

갑자기 정우가 차정우로 변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정우를 바라보는 내다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생각나는 누군가를 위해, 특별한 레시피를 비장의 무기처럼 까내고 싶을 때가 있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네게는 미안하지만 내게는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해.

노란 우산을 왜 그렇게 좋아하나 했더니 행복이 때문이었어.

정우는 자신이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얼굴로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먹 날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세상에 딱 하나 진리가 있는데, 그게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는 거래. 근데 우리가 조금 일찍, 너는 너무 일찍 겪었을 뿐이야.

아빠 역할을 그만둔 사람과 그만둘 사람한테 아빠라고 말할 수 없잖아.

이제는 나도 깜빡 속아서 이게 내 진짜 모습인 줄 착각하게 돼. 차 박사 앞에서는 어른인 척해야 했어. 엄마 병원비도, 엄마를 보살피는 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 차 박사가 딸린 식구인 나까지 걱정하면 안 되니까, 그러면 엄마한테도 차 박사한테도 너무 미안해서. 내가 작은 사고라도 치면 정말 배운망덕한 놈이 될 것 같아서.

엄마가 아픈 건 헤어질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거래. 근데 엄마 돌아가시고 나니까 무슨 준비였는지 모르겠더라. 그냥 안아팠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안 났어. 왜 꼭 돌아가셔야 했을까. 아픈 사람도 다시 일어나고,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는 사람도 있다는데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세상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져. 저기 은행잎을 봐.

은행잎이 예쁘게 보이지만, 다른 누구한테는 치워야 할 쓰레기처럼 보일 수도 있어. 자기 세상 자기가 선택하는 거야. 지긋지긋한 세상 주민이 될지, 저주를 퍼붓고 싶은 세상 주민이 될지. 아니면 예쁜 세상 주민이 될지. 은행잎은 은행잎일 뿐인데 그걸 어떻기 보는지에 따라 은행잎이 다른 의미가 되는 거야.

은행나무는 언제나 서두르지 않는다. 봄에는 연둣빛 잎을 틔우고, 여름에는 뜨거운 햇살과 거센 비바람을 묵묵히 견디고, 가을이 되어서야 기어코 가장 찬란한 노란빛을 보여 준다. 나도 그 은행나무를 닮고 싶다. 조금 늦어도, 많이 흔들려도, 남들보다 천천히 자라도 괜찮다. 기다리다 보면,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잘 익은 노란 계절이 찾아온다는 걸 이제는 믿는다.

오늘 나는 키가 일 센티미터 자랐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자란 것은 키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노랗게 익어 가는 은행잎처럼, 내 마음도 어느새 일 센티미터쯤 자란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의 '노란 일 센티미터' 를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작가의 말

잃기 전까지 내가 가진 게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상실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전학 간 친구와의 이별, 아끼던 반려동물과의 이별 등 우리는 원치 않게 이런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 곁에 <노란 일 센티미터>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 꽃샘이가 다시 일어섰듯, 여러분도 충분히 슬퍼한 뒤 다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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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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