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1970, Love Story)
위 인용구는 미국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의 조사에서 대중에게 사랑받는 가장 인상깊은 대사 13위로 꼽힌 영화 러브스토리의 명대사(제니: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거야')다. 이 영화에 연인으로 등장하는 올리버와 제니의 사랑은 제니가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를 선고 받으며 비극으로 변하고 새드엔딩으로 수년간 대중의 가슴을 울렸다. 이처럼 백혈병은 불치의 병으로서, 무엇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불행의 씨앗으로 영화와 드라마, 책 속에서 수 많은 연인과 가족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하는 비극을 그려내는데 사용되었다. 그런데 2001년 5월 10일 이후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백혈병은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닌 관리와 치료가 꾸준히 이어지면 완치가 가능한 병으로 일순간 변하게 되었다. 이날은 제약회사 노바티스가 개발한 백혈병약 글리벡(Glivec)의 FDA 승인이 공표된 날이다.
[마법의 탄환](2005, 해나무)은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는 만성골수성백혈병(chronic myeloid leukemia, CML)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알약 글리벡의 개발 과정에 얽힌 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다뤘다. 글리벡이 가지는 의학적 의미, 이 약의 진짜 주인공인 환자들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감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책 소개).
개인적으로 약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하게 되었는데 공부를 하면 할 수록 궁금해 지는 것은 약이 작용하는 원리이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추신경계 의약품(CNS drug, 우울병이나 정신분열병 등을 치료하는)들은 소개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는, 탁월한 효과를 인정 받고 있는 약들 조차 그것이 어떻게 질병을 개선하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런 약의 개발에 우연과 운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개발과 발견이 과학과 지식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회의를 불러 일으킨다. 약이 어떻게 작용해서 질병을 치료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당장 환자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서둘러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시장대중에게 공급하는 것은 후에 있을지 모를 재앙(유전자 변형과 같은 장기적 부작용 등)을 모른 척하고 당장의 이익을 취하는 매우 이기적인 시장의 논리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이 책에서 글리벡은 분자생물학적으로 설계(designed)된 그리고 그 설계가 의도된 바를 달성하는 최초의 약으로서 설명되고 있는데, 이 점(연구개발이 신약의 개발에 운이나 우연보다 더 많이 작용한다는 점)은 향후 신약개발의 패러다임을 혁신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과학자들과 그들 역할의 결합이 가장 큰 흥미를 가져다 주었는데, 화학자, 생물학자, 의학자와 경영학자까지 개입하는 신약개발과정의 과학, 경제, 사회적 면면은, 연구실에서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듯 백만 분의 일 단위의 농도를 측정하는 과학자,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삶의 끝에 서 있는 환자들의 요구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연히 신약의 안전성과 효과의 입증을 기다리는 경영자들 모두가 신약의 완성으로 가는 길목마다 큰 역할을 해주고 있음 보여준다. 이렇게 극복한다. 인간이 자연을.
또 다른 약 이야기를 이 책을 보는 동안 접했는데, 영화 컨테이전(2011, Contagion, 링크)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신종 바이러스에 대처해 나가는 사회의 일부일부를 극 형식 보다는 보도 형식을 빌어 담아낸 영화이다. 25%의 치사율을 나타내는 신종 바이러스가 출몰하자 당국(세계보건기구(WHO)와 각 나라의 질병관리통제소 등)은 조사에 착수하고 이 신종 바이러스를 퇴치할 방안을 강구하며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통제하고자 고심한다. 감염자와 가족을 잃은 감염자의 가족들의 삶이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떻게 변(대응)해가는지, 그 집합인 사회는 어떤 현상을 나타내 보여주는지 조망하는 이 영화는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질병의 현상을, 결국 방안이 마련됨(신약의 개발)으로써 구제받는 질병에 대한 사회의 현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컨테이젼을 감독한 사람,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가 또 다른 종류의 약에 대해서도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트래픽(2001, Traffic, 링크)은 미국에 만연해 있는 마약문제를 다룬다. 보도 형식 보다는 극 형식의 비중이 더 큰 이유는 마약과의 전쟁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무심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마약과의 전쟁은 너무 많이 다루어져서 감각이 무뎌진 이들에게 사실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보다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리는게 더 나은 전략이 될 수 있겠다 싶었는지 모른다. 한자로 그리고 한글로도 약(藥)와 악(樂)은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는데 그 차이가 분자적으로도 미미하게 약과 마약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그 둘에 대한 시각과 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