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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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러더라. '사랑은 스쿼시이기보다는 테니스'라고. 사랑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원활한 소통이 있을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법이다. 그 풍경 안에 두 명이 존재한다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로테의 소극적이고도 수동적인 태도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은 '사랑하는' 존재이기보다는 '사랑 받는' 존재이며, 찬양하는 쪽이 아니라 찬양받아야 하는 쪽이다.

남자들은 베르테르처럼 사랑하기를 여자들은 로테처럼 사랑받기를 원했다. 이는 남자라는 유일한 구매자에게 소비되어지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아름다운 포장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없는 여자들의 현주소이다. 사랑은 쌍방향이므로 여자들도 '사랑받기'만을 바라지 말고 능동적으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아직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로테만을 향한, 대상 자체에 집착한 자기애의 역설적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상에 집착하는 감정 표출로서의 사랑은 이미 현대인들의 사랑방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 사랑할 또는 사랑 받을 - 올바른 대상의 발견이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랑은 '능력'과 '태도'의 문제이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즉 '소유'의 문제가 아닌 '존재' 그 자체의 문제일 뿐이다.

이 점만은 분명하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그 사랑의 대상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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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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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글로서의 만남이지만 그와의 첫 만남은 신선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처음 그의 작품을 만난 것은 '첫사랑'이라는 단편을 읽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그의 존재는 단지 주목받는 여러 신인작가군 중 한 사람으로 여겨졌었지만 요즈음 그의 행보는 수 권의 단편집과 소설을 통해 차츰 무겁고 진중해져가는 것 같다. (특히나 '샘터'에 매달 실리는 고전의 향기 코너는 매우 인상적이다)

'첫사랑'이라는 단편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달콤하고 애틋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그의 이름을 보고 느꼈던 여성스럽고 섬세할 것 같다는 이유없는 추측이 빗나가버린 순간!!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의 시대상황을 자신의 첫사랑의 추억과 맞물리게 하면서도 나비, 일식 등의 소재를 통해 첫사랑의 애틋함과 파괴성, 순수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그의 소설에 매력을 느껴갈 즈음... 얼마되지 않아 나의 생일이 돌아왔고, 한 친구는 나에게 다섯 권 가량의 책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이 숨어있었으니...

'나는 믿는다. 箱은 갔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오늘도 내일도 새 시대와 함께 同行하리라고'

<꾿빠이, 이상>의 사건을 움직이는 주요한 동인은 이상의 유품인 '데드마스크'와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의 진위 여부이다. '데드마스크'는 실제로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폐병으로 이상이 숨을 거두었을 떄 제작된 것으로 소문만 무성한 이상의 유품이었다. 작가는 후일담에서 언젠가 들었던 이상의 동생, 김옥희의 회상 - '오빠의 데드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 에서 소설의 초입을 마련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데드마스크'가 과연 누구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어떻게 소실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가 '데드마스크'의 주요 내용을 이루면서 소설의 방향을 이끌어간다. 또한 '데드마스크'와 함께 이 소설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동인은 기존에 알려진 이상의 '오감도' 15편 이외에 미스터리로 생각되어 온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에 관한 이야기다. 비록 실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두 유품이지만, 작가 김연수는 탄탄한 문학적 바탕 위에서 작가의 상상력과 발로 뛰는 자료취재의 열정을 흩뿌려, 이상의 이제까지의 수작들과 21세기를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무거운 주제, 논문을 읽는듯한 세밀한 주석과 설명 등을 사용해 소설의 가독성이 주춤주춤될 여지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작가의 재주이다. '이상'이라는 흥미진진하고 난해한 사람을 소재로 해서 전혀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낸 것, 거기다가 이 소설이 '의외로' 잘 읽힌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탄탄한 구성과 추리소설식의 전개, 자료수집의 성실성 등도 작가의 신뢰를 높이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가 앞으로 쓸 여러 작품들에 있어서 독자에게 긍정적인 의미의 '색안경'을 씌워줄 수 있을 테니깐.

최근에 읽은 한국소설이라는 게 스케일이 작고, 개인적인, 미시적인 사생활에 치우친 것이었다면... 병원 침실에서 빠른 회복을 기대하며 읽기를 재촉했던 - 이 책을 읽은 시기는 작년 겨울 내가 얼굴을 다쳤었던 그 때였다 - 이 소설은 참으로 반가웠다. 국문학과 학생이면 꼭 읽어봐야 할 소설임에 틀림없지만, 일반인에게도 오랜만에 문학적인 열정을 일깨워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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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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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자신의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개츠비는 죽었지만 그의 마음 속 불빛은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개츠비는 위대한 것이다. 그의 '푸른 불빛'은 시작은 갸냘픈 떨림이었으나, 활활 타오르는 불빛으로 끝을 맺었다. 개츠비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들 또한 남들이 보기에는 하잘것 없는 빛(꿈)을 향해 온몸을 던지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세상이, 우리의 삶이 타오르는 불빛 속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온몸을 내던진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얻게 될 수 있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단 한 가지 사실은 명백하다. 비록 이 세상에서 쓸쓸히 잊혀진다고 해도... 우리 마음 속 불빛은 영원히 이 세상을 비춰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불빛은 개츠비처럼 흐릿한 불빛을 바라보며, 열망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다시금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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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 최재천의 동물과 인간 이야기
최재천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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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교수. 신문사에서 기자일을 하면서 꽤 많이 들었던 이름이다. 학술부 기자들이 그에게 글을 청탁하기도 하고, 나도 수습기자 시절, 새로나온 책 서평을 쓰면서 종종 그의 이름을 들었다. 그 후 신문과 잡지 등에서 그의 이름은 언뜻언뜻 꽤 많이도 눈에 띠었던 것 같다. 막연히 생각하기에 동물행동학자로서의 그의 모습과 신문과 잡지, 문학계간지 등에 기고하는 그의 두 가지 모습은 나의 뇌리안에서 미술시간에 해보았던 데깔꼬마니처럼 똑같이 펼쳐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혼란스러웠던 나의 데깔꼬마니가 점점 하나의 동일한 모습으로 합쳐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머리말에서 어려서부터 자신은 글쟁이가 되고 싶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리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의 고백치곤 어줍잖은 일이지만, 아홉 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아... 나는 눈을 씻고 다시 펼쳐보았다. 그렇다. 그것은 어줍잖은 나의 고백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쓰시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나 역시 문학에 일찍 눈을 뜨게 되고... 단 몇 줄의 글을 쓰기 위해 가슴을 졸인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저 멀리 미국땅에서 배우고 온 동물의 행동과 생태는 평생 글만 써온 '글쟁이'들에 비해 엄청나게 풍부한 글의 소재를 소유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이 책의 내용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동물 속에 인간이 보인다'

한편 한편 짧은 글 속에 본능이 살아숨쉬는 동물들의 행동과 행태를 인간에 빗대어 잘 녹여냈다. 그의 글 속에서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또는 잘못 알고 있던 동물들의 생태에 대해 조금 더 정교하게 알수 있는 '지식'을 줌과 아울러, 자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의 삶을 뒤집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하지만 그는 경계하고 있다. '자연주의적 오류'를 말이다. 동물들의 눈으로 감히 인간을 훈계하진 않겠다며. 지금까지 동물들의 편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도는 없었다. 어리석은 인간의 눈으로 동물들을 평가하는 일은 많았지만 말이다. 어려서부터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열망과 날렵한 글발은 영원한 자연의 진리 속에서 우리를 다시금 겸허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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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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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 읽었던 책 중 나에게 잠시나마 책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해준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학교 구내서점에서였다. 공강시간에 매번 같은 일 - 전산실에서 오락을 하거나, 친구들과 팩차기를 하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 을 하는 것에 지겨워져 있던 나는 학교 구내서점에서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내가 있는 공과대학 건물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구내서점을 가기위해 휘적휘적 힘들게 걸어갔다. 그 곳에서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내가 골라놓은 책들 위로 누군가가 보다가 제자리에 꽂지 않은 책 하나가 보였다. 왠일로(?) 착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제자리에 책을 꽂아놓으려는 마음에 그 책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그 책에 조금씩 빨려드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그 책으로 인해 내 책가방엔 하나의 짐이 더 늘어나긴 했지만...

하여튼 이렇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나와 첫 대면을 하게 된 책. <호밀밭의 파수꾼>.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내가 떠올린 것은 넓은 대지에 펼쳐져 있는 호밀밭과 그 가운데 서 있는 파수꾼 - 난 허수아비가 떠올랐다 - 이었다. 미국 평원의 광활한 밀밭. 광활한 밀밭에서 밭을 가꾸며 살아가는 한 단란한 가정. 외부 세력으로부터 힘들게 밀밭을 지켜 나가는 아들과 아버지의 정. 그리고 가족들의 이야기... 이런 내용을 기대하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강한 배쒼(!)을...!

소설의 무대는 도시 한 복판의 맨하탄의 한 사립학교. 밀밭은 커녕 온통 도시 속 풍경들만 나온다지...^^; 호밀밭은 단순히 하나의 상징으로만 사용된 것이다. 20세기 미국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는 장편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1년 출판된 이후, 사춘기 청소년이 사회와 가정에 대해 느끼고 있는 심리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손꼽히며 격찬을 받아왔다.

주인공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철저한 냉소이다. 그에게는 세상이라는 규범에 맞추어 살아가려는 보편적인 인간들의 몸부림이 모두 허위와 가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적절한 타협도, 아부도, 용서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의 정신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혼자만의 영역 속으로 함몰된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는 정신은 자꾸만 내면으로 확장된다. 그는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기보다는 호밀밭처럼 넓은 자신만의 세계를 꿈꾸며 그 호밀밭에서 아이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소박하고 작은 꿈으로 귀결된다.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결국 이 소설의 작가 샐린저는 홀든 코울필드라는 다소 삐딱해 보이는 한 냉소적 자아를 내세워 우리에게 본질에 대한 통찰의 질문을 던진다. 코울필드는 정신병원에 갔지만 그가 정말 미쳤는가? 허위로 가득찬 세상이 미친건가?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든다. 주인공 코울필드 식의 영혼이 정말로 순수하고 맑은것이라면, 그런 식의 삶이 진정한 삶이라면, 혹은 가식적이지 않은 삶이라면, 우리 개개인은 과연 이 세상에 어울리면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세상이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찼다고 해서 코울필드처럼 냉소로 일관해야 하는가, 혹은 더불어 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가.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이래저래 참 힘든 일 같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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