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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물론 글로서의 만남이지만 그와의 첫 만남은 신선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처음 그의 작품을 만난 것은 '첫사랑'이라는 단편을 읽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그의 존재는 단지 주목받는 여러 신인작가군 중 한 사람으로 여겨졌었지만 요즈음 그의 행보는 수 권의 단편집과 소설을 통해 차츰 무겁고 진중해져가는 것 같다. (특히나 '샘터'에 매달 실리는 고전의 향기 코너는 매우 인상적이다)
'첫사랑'이라는 단편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달콤하고 애틋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그의 이름을 보고 느꼈던 여성스럽고 섬세할 것 같다는 이유없는 추측이 빗나가버린 순간!!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의 시대상황을 자신의 첫사랑의 추억과 맞물리게 하면서도 나비, 일식 등의 소재를 통해 첫사랑의 애틋함과 파괴성, 순수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그의 소설에 매력을 느껴갈 즈음... 얼마되지 않아 나의 생일이 돌아왔고, 한 친구는 나에게 다섯 권 가량의 책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이 숨어있었으니...
'나는 믿는다. 箱은 갔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오늘도 내일도 새 시대와 함께 同行하리라고'
<꾿빠이, 이상>의 사건을 움직이는 주요한 동인은 이상의 유품인 '데드마스크'와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의 진위 여부이다. '데드마스크'는 실제로 도쿄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폐병으로 이상이 숨을 거두었을 떄 제작된 것으로 소문만 무성한 이상의 유품이었다. 작가는 후일담에서 언젠가 들었던 이상의 동생, 김옥희의 회상 - '오빠의 데드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 에서 소설의 초입을 마련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데드마스크'가 과연 누구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어떻게 소실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가 '데드마스크'의 주요 내용을 이루면서 소설의 방향을 이끌어간다. 또한 '데드마스크'와 함께 이 소설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동인은 기존에 알려진 이상의 '오감도' 15편 이외에 미스터리로 생각되어 온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에 관한 이야기다. 비록 실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두 유품이지만, 작가 김연수는 탄탄한 문학적 바탕 위에서 작가의 상상력과 발로 뛰는 자료취재의 열정을 흩뿌려, 이상의 이제까지의 수작들과 21세기를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무거운 주제, 논문을 읽는듯한 세밀한 주석과 설명 등을 사용해 소설의 가독성이 주춤주춤될 여지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작가의 재주이다. '이상'이라는 흥미진진하고 난해한 사람을 소재로 해서 전혀 새로운 소설을 만들어낸 것, 거기다가 이 소설이 '의외로' 잘 읽힌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탄탄한 구성과 추리소설식의 전개, 자료수집의 성실성 등도 작가의 신뢰를 높이는 또 하나의 요소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가 앞으로 쓸 여러 작품들에 있어서 독자에게 긍정적인 의미의 '색안경'을 씌워줄 수 있을 테니깐.
최근에 읽은 한국소설이라는 게 스케일이 작고, 개인적인, 미시적인 사생활에 치우친 것이었다면... 병원 침실에서 빠른 회복을 기대하며 읽기를 재촉했던 - 이 책을 읽은 시기는 작년 겨울 내가 얼굴을 다쳤었던 그 때였다 - 이 소설은 참으로 반가웠다. 국문학과 학생이면 꼭 읽어봐야 할 소설임에 틀림없지만, 일반인에게도 오랜만에 문학적인 열정을 일깨워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