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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응급실 - 병원의 최전선에서 사람 살리는 이야기 날마다 시리즈
곽경훈 지음 / 싱긋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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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징거리려면 혼자서 해. 거울을 보면서 거기 있는 머저리에게 징징거리라고!"

-~~~ 몇몇 의사는 '응급실은 인턴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그들은 과연 그렇게 인턴에게 맡겨둔 응급실에서 얼마나 많은 '예방 가능한 사망'이 발생했는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했을까?

-흉부외과의사는 '생명을 구하는 멋진 외과의사'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이며 메디컬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등장인물이다. 혈관조영술을 이용한 다양한 시술이 발전하고 의학이 보다 작은 손상을 만드는 기술을 선호하는 쪽으로 발전하면서 20세기 중후반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렸으나, 그래도 흉부외과의사는 여전히 '칼잡이 중의 칼잡이'가 틀림 없다.

-방역조치를 위반한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비난하고 책임을 물어도 좋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과 성적 지향, 성 정체성은 비난, 증오,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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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말 - 작고 - 외롭고 - 빛나는
박애희 지음 / 열림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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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나도 열이 38도가 넘던 날이었다. 유치원을 하루 쉬게 된 아이가 뜨거워진 이마를 내게 기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우리만 휴가네!" 아픈 순간에도 기어이 찾아내는 오늘의 행복. 아이 덕에 그날은 힘들었던 날이 아닌, 우리만의 특별한 휴가로 곱게 기억에 남았다.

-아기였던 아이가 어린이로 자라 '대화'라는 걸 하게 되면서, 나는 자주 감탄했다. 아이는 어른인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일상의 행복들을 연금술사처럼 잘 건져냈다. 그때마다 작고 사소한 순간들이 반짝였다.

-여리지만 용감하고, 엉뚱하지만 사랑스럽고, 똑똑하지만 외롭고, 제멋대로지만 다정하고, 어설프지만 당당한 어린이들을 만날 때면 때로는 웃음이 났고, 때로는 설렜고, 때로는 울컥했다.

-물론 아이들의 질문은 종종 맥락에 맞지 않을 때도, 다아는 뻔한 것일 때도, 지나치게 장난스러울 때도 많다. 그래도 아이들의 질문을 어른들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주어야 하는 건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다. "왜 그렇게 해야 할까?" "이게 정말 가장 좋은 방법일까?" 질문을 통해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해나가는 경험은 아이들을 수동적인 삶에서 주도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할 테니 말이다.

-세상을 위해서도 질문은 필요하다. 상식과 규칙에 대해 의심하는 질문이 없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의 이면을 의심하며 탐구하는 물음표가 없다면, 불합리한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금의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앞선 세대의 수많은 질문 덕분에 우리는 더 나아진 세상에서 같은 실수와 후회를 조금이나마 덜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 "그냥 그런 거야." "그러려니 해." 아이를 키우면서 그 말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자란 아이들이 어느 날 세상의 결함을 발견했을 때, 부조리한 수간에 맞닥뜨렸을 때, 불합리한 상황에 마주쳤을 때 질문과 이의 대신 침묵과 체념을 선택하며 그것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 혹시라도 믿게 될까 봐.

-행복은 삶을 제대로 느낄 때 찾아온다. ~~~ 그들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행복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과 잘 놀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구의 시선도 상관하지 않고, 투명하게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는 어린이는 그래서 하루에 500번 넘게 웃는다.(어른들은 평균 열 번).

-~~~ 소원을 품고 꿈을 꾸는 어린이들을 좌절시키는 건 어른들이 정해놓은 틀이다. 여기서 벗어나면 위험해. 아직은 너 혼자 할 수 없어. 그래 봤자 소용없어. 더 크면 할 수 있어. 하지만 어린이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

-기적은 멀리 있어도,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빛난다. ~~~ 희망과 기대를 배시하는 삶의 여정속에서도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는 가끔 걸음을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엄마 생각이 났겠지. 지금 아니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해도 맨날 "잠깐만" "조금 이따가" "나중에"라는 말을 반복하며 바쁜 척만 하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는 힘과 순수를 잃고 싶지 않은 의지를 가진 아이들은 어른들이 믿고 기다려주기만 한다면 언제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스스로 찾아간다는 것을 말이다.

-마치 날 때부터 그런 아이인 것처럼, 보이는 문제가 아이의 전부인 것처럼, 아이들을 쉽게 예단하며 수군거리는 어른들의 말이 아이에게 하나의 낙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른들은 종종 잊는다.

-~~~ 아이들은 언제나 지금의 내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의 아이가 내가 알던 아이가 아니라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고, 그때는 그랬지, 하며 추억 속에서 허우적대는 건 언제나 어른들 몫이다. ~~~ 몸과 마음이 훌쩍 자란 아이가 내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마주 서러면, 나 또한 어제의 나를 버리고 날마다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 인생이란 여행은 목적지보다 방향이 더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고. 원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지 없을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삶은 나의 의지만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살아보면 누구나 절감한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갈 것인지 그것만큼은 우리가 정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려는 마음은 지킬 수 있는 거다. "어떻게'라고 묻는다면 동구의 말을 빌려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언제나 즐겁게.

-그래서 요즘 다시 생각해보는 나의 장래 희망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말보다 행동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누군가 이야기할 때까지 가만히 들어주되 앞서서 질문하지 않는 사람. 파도처럼 차르르 밀려왔다 스르르 물러갈 때를 아는 사람.

-~~~ 그리워했던 만큼 힘들었던 만큼 괴로웠던 만큼 행복은 더 진하고 값지다. ~~~

-우리가 원하는 진짜 어른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모르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 관계의 상당 부분은 ‘운’이 작용한다는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이성종, 당신 아들, 문제없어요))을 기억하는 것도 관계에 허덕일 때 도움이 될 수 있다.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는 대신 그저 운이 나빴응 뿐이라고 문제에 단순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감정을 빠르게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을 괴롭히는 말들을 애써 찾아가며 상처 입은 마음을 다시 헤집는 것보다 차라리 상처 준 상대를 속으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게 낫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 존재는 바로 나니까. 용서고 이해고 뭐고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한 다음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상처 받고 나서 습관처럼 내가 나를 할퀴려고 할 때면 일부러 이 말을 생각한다. "It's not your 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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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만 헤어져요 - 이혼 변호사 최변 일기
최유나 지음, 김현원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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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은 ‘말’이 아닌 ‘옆에 있어주는 것.’ 떨어진 그녀의 꽃잎을 ‘보듬어주는 것.’ 마음을 다해 대해주는 것.

-공포에 떨전 나를 외면하지 않고 나선 그 사장님을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는 데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배우고 또 배운다.

-이제는 안다. 변호사님 결혼했냐는 그 질문은 가정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소중하고 소중한 것을 내려놓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결심을 번복했는지 아느냐는 뜻이라는 것을.

-~~~ 바로, “잘 싸우는 사람과 결혼하라”는 것. 안 싸우는 사람은 무조건 참기만 하는 사람이라 오히려 좋지 않다. 싸울 때 상대방에게 현명하게 주장을 전달하고 서로 원하는 것을 잘 조율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은 뭐든 잘 해낼 사람이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간에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한다. 왜 그러고 사느냐는 둥 더 참으면 바보라는 둥 그 정도 가지고 경솔하게 결혼 생활을 정리하느냐 둥, 남들이 비난하든 말든 정답은 자기 안에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은 후회의 동물이다. 후회는 작은 불씨에서 미화된 추억을 촉매 삼아 자책이란 큰불로 번진다.

-결혼한 이들의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결혼하면 불행해질 거라는 뜻이 아니다. 혼자일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지만, 그 행복을 얻으려면 상상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 그러니까, ‘각오하라’는 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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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어 살아낼게 - 세월호 생존학생, 청년이 되어 쓰는 다짐, 개정판
유가영 지음 / 다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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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 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한적이 있어요. 그 시절 우리는 참사의 당사자였지만 어른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세상이 더 이상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세상은 시련을 겪은 누군가가 그걸 훌륭하게 극복해내야, 그제야 그 사람을 바라봐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박수를 받는다고요. 그러니 저 역시 제게 주어진 이 시련을 보란 듯이 이겨 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그때까지의 저의 삶을, 우리가 견뎌 낸 고통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어요.

-~~~ 그때의 우리가 겪었던 것처럼 '막을 수 있었던 인재'로 희생되는 사람들이 없길 바랐는데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웠어요. 하지만 그런 원망도 잠시, 세월호 참사 때와 달라진 게 하나 없는 듯한 세상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똑같은 말과 상황이 이어지는 걸 보면서요. 놀러 갔다 사고 난 게 자랑이냐는 식의 비방과 혐오, 보호받지 못하는 피해자와 유가족, 부족한 심리치료 지원, 책임을 미루는 어른들과 책임지지 않는 책임자들....

-저는 세상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다음 세대인 아이들도, 더 성장해 나갈 저의 세대 사람들도 우리 앞에 벌어진 참사에 두 눈 뜨고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 남겨진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이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 부디 관심을 거두지 않기를, 생각을 멈추지 말기를 바랍니다.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쯤 기다렸을까요. 배 안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있던 방에선 창을 통해 바다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배가 기울어 수면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눈으로 알 수 있었어요.

-배는 이제 더 이상 갑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어요. 그래도 아주 조금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주위로 작은 배들이 모여들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요.

-그러다 얼마 뒤 뉴스에서 '전원 구조'라는 자막과 함께 앵커의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구했다는 소식이었어요. 우리의 얼굴에는 그제야 조금씩 안도감이 퍼졌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 배에는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명을 포함해 총 476명의 탑승객이 타고 있었다. 오전 11시경 '전원 구조'라는 속보가 여러 방송을 통해 퍼져 나갔으나 이는 오보였다. 그날 생존한 학생은 75명에 그쳤다.

-저는 그날 그 배에서 살아 나왔지만, 같이 배에 올랐던 다른 친구들은 결국, 앞으로 영영 인사를 나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아침밥을 먹었던 친구들도, 어젯밤 같이 춤을 추었던 친구들도. 며칠을 기다려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요.

-기자들은 아직 정신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우리에게 서슴없이 질문하고 몰래 사진까지 찍으려 했어요. 한번은 방문객으로 위장한 기자가 제 친구의 병실에 찾아든 적도 있었고요. 그뿐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알아냈는지, 우리들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오기도 했습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그런 기자들을 피해 다녀야 했고요.

-장례식장 안은 무척 암울했어요. 제가 누구인지 밝힐 수 없었지만 몇몇 사람은 저의 상태를 보고 단원고등학교 학생이란 걸 바로 눈치챈 듯했습니다.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성르 하고 있을까요. 저는 사후 세계를 믿는 편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태어나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단원고 학생이지? 내가 택시기사라 너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렇게 태워 주는 것밖에 없어서 그래. 힘내고 학교 잘 다녀라."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참사를 대가로 대입 특례를 요구한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참사 이후 저와 친구들은 모두 반쯤 넋이 나간 채 시간을 보냈고, 뭔가를 계산하거나 내 것을 챙기기에는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댓글들은 아직도 제 마음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아픈 말이 있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세월호 탈 걸 ㅋㅋㅋ]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 저는 상실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 일이 없던 일이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내놓아도 좋다고, 그러니 다시 내 친구들을 돌려 달라고 매일 빌었습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천장이 무너져 내려 저를 덮칠 것만 같았으니까요. 방문이 닫혀 있을 땐 잠들기 힘들었습니다. 주방에서 난 불을 알아차리지 못해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거든요. 지하철을 탈 때는 사고가 날 것만 같아 항상 땀이 찰 정도로 손잡이를 꽈 쥐었습니다. 건물에 들어갈 땐 언제 무너지질 모른다는 생각에 비상구를 살피게 되었고요. 그렇게 저는 큰 불안 속에 콩콩 갇혀 버렸습니다.

-가족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언제나 함께 있었어요.

-세월호 참사가 있기 반년 전, 저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와의 이별을 채 받아들이지 못하던 때 또다시 사고로 많은 친구를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저에게는 작은 목표가 생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인식을 당장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저처럼 힘든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알고 스스로 탓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코로나19 예방법도 물론 중요하지만, 재난으로 인한 누군가의 상처를 우리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바로 거기에 진짜 중요한 게 있다고요.

-이런 재난 상황이 일어나면 많은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와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걸 더욱 느낄 수 있었어요.

-~~~ 하지만 그 일로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어 아픔을 공감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에게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송을 코앞에 두고 PD님으로부터 방송 불가 지시가 내려왔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곧 총선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10년이 흘렀는데도 세상은 아직도 바뀐 게 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로부터 10년, 그리고 앞으로 또 살아갈 10년. 우리는 앞으로 10년 동안 어떻게 나아가게 될까요. 부디 그날들이 전보다 안전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4월 16일, 그 배에서 저를 도와주신 분들을 시작으로 지난 10년 동안 제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주고, 지탱해 주신 많은 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저와 다르지만, 다른 곳에서 다른 형태로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계신분들께, 당신은 잘 싸우고 있다고, 조금만 더 힘내라고 말하고 싶어요.

-2014년 가을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는 일상과 비일상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수업시간에 졸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돌아오지 못한 친구가 보고 싶어 기억교실로 달려가고, 자꾸 떠오르는 참사 장면에 멍해지고,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재난은 그 자체로도 끔찍하지만 이후에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바로, 이 세상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안전하지 않았던 경험은 재난이 만든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더디게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어떤 일들이 그저 지나간 것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거기에는 누군가 할퀴고 간 지워지지 않는 상처, 또 누군가 기꺼이 나누어 준 온기가 온통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하고' 또 '마주 선'가영이의 치열한 고민과 용기가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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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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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나는 학년에서 제일 작은 정대가 아니었어. 세상에서 누나를 제일 좋아하고 무서워하는 박정대가 아니었어. 이상하고 격렬한 힘이 생겨나 있었는데, 그건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오직 멈추지 않는 생각들 때문에 생겨난 거였어.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누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눈도 뺨도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를 진하고 끈적끈적하게 만들었어.

-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어.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멀어진 지 십분이 채 되지 않아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이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왜 그는 죽었고, 아직 나는 살아 있는지.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늑밍르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리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우리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 죽을 거지만, 여기 있는 어린 학생들은 그래선 안된다.

-~~~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

-~~~ 이른바 극렬분자, 총기 소지자들만 상 무대에 남았습니다. 고문의 양식이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구타보다 정교하게 고통을 주는 방식, 고문하는 사람들의 체력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을 그들이 택한 것입니다. 비녀 꽂기,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이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들의 세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련한 각본에 우리들의 이름으로 빈칸을 채울 수 있도록,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거짓 자백뿐이었습니다.

-~~~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잘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

-주섬주섬 그간의 안부를 묻는 동안, 우리의 눈길은 투명한 촉수처럼 조용히 서로에게 뻗어나가 얼굴 안쪽의 그늘을, 대화와 헛웃음으로 덮이지 않는 고통의 흔적을 어루만져 확인했습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련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린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중앙정보부가 구사대를 직접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 폭력의 정점에 군인 대통령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머시매 걸음은 빠르고 나는 늙었는디, 아무리 걸어도 따라잡을 수 잇어야제. 조금만 옆으로 고개를 돌려주면 옆얼굴이 보일 것인디, 아무 데도 안 둘러보고 앞으로, 앞으로만 가야. ~~~ 하얀 하복 반소매 아래 호리호리한 팔뚝이 영략없이 너였단게. 좁은 어깨하고 길쭉한 허리하고 걸음걸이가, 고라니 같이 앞으로 수그러진 목이 꼭 너였단게. ~~~ 네가 나한테 한번 와준 것인디,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한번 보여줄라고 온 것인디, 늙은 내가 너를 놓쳐버렸어야. ~~~ 알 수 없다이, 그날은 왜 내가 이름 한자리 못 불러봤는지. 입술이 달라붙은 사람맨이로, 쌕쌕 숨만 몰아쉼스로 뒤를 밟았는지. 이번에 내가 이름을 부르면 얼른 돌아봐라이. 대답 한자리 안해도 좋은게, 가만히 돌아봐라이. 아니제, 그럴 수 없는 것을 내가 알제. 내 손으로 너를 묻었은게. ~~~ 베니어판으로 짠 관에다 너를 넣고 청소차에 싣고 갈 적에, 너를 지킬라고 내가 앞자리에 탔은게. 청소차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네가 있는 뒤쪽만 뚫어져라고 지켜보고 있었은게. ~~~ 느이 형들이 입술을 꽉 물고서 울고 섰던 것도 아슴아슴 떠오른다이. ~~~ 관 뚜껑 닫기 전 마지막으로 봤떤 네 얼굴이 얼마나 핼쑥했던지.

-나라에서 죽인 동생 원수를 무슨 수로 갚는다냐.

-그 군인 대통령이 온다고, 그 살인자가 여기로 온다고 해서..... 네 피가 아직 안 말랐는디.

-내 아들을 살려내라아. 살인마 전두환으 찢어죽이자아. 정수리까지 피가 뜨거워지게 소리 질렀다이.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비서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되었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만에 하나 도청이 함락되지 않을 경우 전투기를 보내 도시를 폭격하는 수순을 검토하고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어젯밤 그의 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동생이 운이 좋았다고, 총을 맞고 바로 숨이 끊어졌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이상하게 열기 띤 눈으로 내 동의를 구했다. 동생과 나란히 총을 맞으며 동생과 나란히 묻힌 고등학생 하나는 바로 안 죽고 살아 있다가 확인사살을 당했던 모양이라고, 이장하면서 보니 이마 중앙에 구멍이 뚫리고 두개골 뒤쪽은 텅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학생의 아버지가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울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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