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1 | 112 | 113 | 1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내가 처음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이다.  읽기 전에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들을 먼저 수집했는데, 결론은 "이 사람 스타일이 어떤 건지 도무지 모르겠어" 였다. 리뷰들을 읽어보면 하나같이 "재미있고" "경쾌하고" "감동적이다"는 식으로 호평 일색이라는 것은 확인되지만, 아아 아마도 이런 스타일의 글을 쓰겠구나 하는 그림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그만큼, 적어도 내 독서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꽤 참신한 스타일을 갖추고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랬다. 깜짝 놀랄 만큼 신선했다. 특히, 피와 불과 가족애와 복수와 권선징악이라는 너무나도 고전적인 소재를 새롭게 가공하려는 의도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천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결론적으로 신선한 만큼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피와 불의 이야기이다──라고 말하면 역시 너무 무겁다. 피와 불이라는 뭔가 인간을 초월한 듯이 엄숙한 단어에서 무게를 덜어내서, '유전자'와 '방화'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화자인 형 이즈미는 유전자정보 회사 '진리치'에서 근무하고, 동생 하루는 강간범의 유전자를 이어받았다. 방화사건의 수수께끼에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하루다.  형제가 거주하는 센다이 시 일대에 일어나는 연쇄방화사건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 방화지역 근처에는 반드시 기묘한 메시지를 품은 그래피티 아트가 있다. 그 규칙을 하루가 알아낸 것이다.  이즈미는 하루가 혹시 방화사건과 연루된 것은 아닌지, 어딘가 정신이 불안정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나름대로 사건의 진상을 향해 다가간다.

   ── 라는 식의 요약은 사실 이 이야기의 중심을 간단히 비껴나가 버리고 말지만,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진상을 이런 데서 밝힐 수도 없는 일. 이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만약에 완벽히 분리시킬 수 있다면, 아마 내용 자체는 엄청나게 식상할 수도 있겠다. 앞서 말했듯이 깜짝 놀랄 정도로 '고전적인'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소재들이 구성의 기발함에 도움받아 아주 좋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본격 미스터리처럼 강박적인 정교함을 무기로 삼는 것은 아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예컨대 고등수학 문제풀이에 비유한다면, 이 책은 말 그대로 퍼즐놀이다. 교묘한 미스리딩은 없지만 가벼운 서술트릭과 곳곳에 배치된 복선들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대화나 독백이 미스터리의 진상과 연결되기도 한다. 아마 쉽게 눈치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치채도 상관 없다. 이상하게도 트릭과 복선을 눈치채 버려도 소설을 읽는 재미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중력 삐에로] 한 권으로는 지나친 속단일 수도 있겠지만,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의 스타일은 이렇게 요악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는 하이브리드. 미스터리와 스토리텔링, 캐릭터-드리븐(?), 시나리오적인 구성  등등 작법상의 혼합이나 각기 다른 영역에서 쓰이는 소재들의 혼합, 그냥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의 혼합성 등. 둘째는 책 제목이 드러내고 있는,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전하는'  태도. 중력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중력이 없는 듯 '붕붕 날아다니는', 슬픈 분장을 하고 관객을 웃기는 '중력의 삐에로'는 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야기꾼으로서의 이사카 코타로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 와 '불' 의 이야기에서 무게를 덜어내는 삐에로의 손이야말로 이사카 코타로라는 작가의 최강점이 아닐까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의성의 즐거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노혜숙 옮김 / 북로드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제목: 창의성의 즐거움

원제: Creativity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Mihaly Csikszentmihalyi]

이 책은 창의성에 대한 연구 보고서이다. 그러나 정보 이외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보고서'들과는 달리, 한구절 한구절이 오랜 연구에서 우러나온 작가의 통찰력으로 빛나고 있다. 책의 목적과 다루는 분야, 서술 방식을 다 떠나서도 이 책의 책으로서의 가치와 글로써의 아름다움은 높은 수준이다.

저자는 '어떻게 사는 삶이 바람직한 삶인가'의 화두에 깊이 사로잡힌 사람들 중 하나다. 그는 그 답을 '행복한 삶' 이라고 보고, 인간의 행복에 대해 심리학자로서 오랜 연구를 해 왔다. 현재 그가 도달한 행복의 조건은 '몰입'과 이를 심화시킨 '창의성'인 듯이 보인다. '몰입'은 개인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햐는 핵심 요건이며, '창의성'은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가능성을 가진다.

저자가 정의하는 '창의성'이란 '문화 속에서 어떤 상징영역을 변화시키는 과정(17p)'이다. 창의성은 영역, 현장, 개인의 세 요소로 이루어지는 한 체계이다. 우리가 흔히 '그는 창의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의 '창의적'이 의미하는 바는, 저자에 의하면 '똑똑하거나' '독창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28p). 저자는 앞서 말한 '체계로서의 창의성'과, 일반인의 관점에 가까운 '성향으로서의 창의성'을 구분하고 전자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가끔 후자의 의미로서의 '창의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책의 후반부 (13장 '창의력 향상시키기') 에서는 후자에 중점을 두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의 연구 방법은 창의적 인물들과의 직접 면담이다. 그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창의적 인물들만이 갖는 공통점을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추스리고 거기로부터 창의성의 조건을 유추한다.

 책 전체를 통틀어 내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오는 대목은 '창의적 인물들의 복합성' 이다. '그들은 서로 반대되는 특성들을 함께 갖고 있다. 흰색이 스펙트럼의 모든 빛깔을 포함하고 있듯이 그들은 내면적을 인간이 지닐 수 있는 특성들을 함께 결합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인물들은 정신분석학자인 칼 융이 성숙한 인격으로 생각했던 것과 일치하는 여러 가지 성향들을 갖고 있다'(70p).'복합적인 인격이란 중립이나 평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극 사이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경쟁적이지도 않고 협조적이지도 않은 어중간한 성격이 아니다. 그보다는 경우에 따라 한쪽에서 다른 족으로 움직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분명 양극을 달리면서 아무 갈등도 느끼지 않고 똑같은 강도로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한다'(70~71p). 이 복합성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는다면 성향으로서의 창의성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1장에서 '창의성'의 정의, 인물, 창조 과정, 몰입과 창조의 관계, 환경 등에 대해 설명하고 창의적 생물의 생에와 창조 활동의 영역에 대해서도 각각 장을 할당한다. 구성 면에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함은 물론, 각각 내용에도 명료함과 충실함이 보인다.

이 책은 이론을 정립하고 체계화하는 책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연구의 내용을 설명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도움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 내 경우에는 이 책은 수준 이상의 목표 성취를 이루었다고 본다.

첫째로 독자가 좀더 창의적인 인물이 되려는 의도에 이 책은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책이 제시하는 정보들은 이제껏 보아 온 창의성 주제의 다른 책들보다 정확한 편이고, 핵심적이다. 또한 음미하지 않을 구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정보의 질과 양적 측면에서도 다른 책들을 압도한다.

둘째로 독자가 굳이 창의적 인물이 되려는 의도가 없더라도, 이 책은 삶과 인간, 여기서 다루는 문화의 영역들에 대해 좋은 통찰을 제공한다. 산책하듯 읽어도 주울 것이 많다.

여기서 단점을 집어낼 생각은 별로 없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일단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의견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겐 실망스럽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읽으면 어디선가 봤던 소리들이 또 되풀이된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정보의 새로움이 아니라 그 질과 양, 전달 체계에 있는데도 말이다.

또한 완벽한 이론적 체계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도 성에 안 찰 것이다. 내 경우에는 다 읽은 후 좀 허전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책의 목적을 고려해볼 때 이 정도면 적절한 수준이라고 본다.

저자의 다른 책 "Flow"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아직 안 읽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1 | 112 | 113 | 11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