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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평점 :
악마의 증명 - 최고! 최고! 최고!
대전 여행을 갔다가 서점에 들러 사온 책.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판매 서지만 봐놓고 나온 줄 모르다가 신간 매대에 놓인 걸 보고 거의 척수반사적으로 집어들고 말았다. 요즘 읽지도 못할 책 사서 무엇하랴 하고 허무감에까지 시달리고 있었는데... 습관의 관성이라는 건 정말 무섭다.
도진기 작가의 지면발표작과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꾸린 단편모음집. 특히 초기작들이 눈에 띈다.
뒷표지에 ˝현직 판사에서 ‘글 쓰는 변호사‘로 돌아온 도진기의 첫 소설집!˝이라는 프레이즈가 적혀 있는데, 사실 이걸 보고 갸우뚱했다. 2012년에 중단편집 <순서의 문제>가 이미 나왔으니까. 그런데 방점을 ‘첫 소설집‘이 아니라 ‘변호사가 된 후 첫‘에 둔다면 틀린 정보는 아닌 것 같기도..... 설마 이 카피부터가 트릭이었던 건가?!
사실 모든 단편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멋지다! 진짜 개쩐다! 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성급히 리뷰부터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성질 급한 거 봐라ㅋㅋㅋ
읽은 것은 <악마의 증명> <선택> <외딴집에서> <구석의 노인> <시간의 뫼비우스>. 앞으로 세 가지의 단편이 남았다.
<악마의 증명> <선택> <구석의 노인>은 본격추리물. 우선 추리소설로서의 깔끔한 퀄리티에 압도되었다.
<악마의 증명>은 쌍둥이를 이용해 트릭을 설치한 범죄자와 이를 간파하는 검사의 이야기. 중반부까지는 이걸 도대체 어떻게 깨려나... 하다가 마지막에 서로의 심리와 수를 읽는 공방이 화려하게 연출된다. 정보 전달, 인물 묘사, 이야기의 장악력까지...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작가 후기를 보고 이 작품의 아이디어가 드라마에 도용되었다는 걸 알게 되어 놀랐다. 이 아름다운 작품이 그런 수모를 치렀다는 게 착잡하다.
<선택>은 <악마의 증명>에서 활약한 검사 호연정이 변호사가 되어 맡은 기묘한 사연 이야기다. 한밤 중 어린아이와 함께 차를 달리다가 절벽에 떨어져 사망한 여자 의사. 그런데 그녀의 사망 원인은 메스로 손목 동맥이 찔린 데 의한 실혈사다. 경찰은 이를 자살로 처리하고, 보험회사는 거기 의거해서 사망보험금 지불을 거절한다. 여의사의 어머니에게서 사건 의뢰를 받은 호연정은 사망 상황에 부자연스러움을 느끼고 타살 혹은 사고사라는 증거를 얻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의문을 더해 가다 마침내 밝혀지는 진실은 너무나도 기구하다....
이 작품은 한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을 받은 작가의 등단작. 정말 뭐랄까... 그저 대단하다. 수사과정과 판단과정에서 탄탄한 리얼리즘을 느낀다.
<외딴집에서>는 이럴수가! 본격 기괴환상물이 아닌가! 연쇄 토막살인마의 집을 우연히 발견한 사립탐정. 그는 몰래 정황을 파악하는데, 연쇄살인마에게 발각되어 얻어맞아 정신을 잃고 만다. 눈을 뜬 그는 연쇄살인마의의 집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작가 후기에서는 작가의 오컬트 취향이 드러난 글로, 하루만에 신나서 썼다고 한다. 오컬트한 글이 가뭄인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하이퀄리티한 기괴환상물을 읽을 수 있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구석의 노인>은 에마 오르치의 작품에서 제목을 빌려 왔지만,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와 같은 테이스트를 느낀다. 자신감 넘치는 변호사가 의뢰인의 무죄를 증명하려 한다. 그에겐 주장을 정당화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 공판에 찾아오는 한 노인의 시선이 자꾸 신경이 쓰인다. 공판에서 예상치 못한 검사의 반격에 주춤한 그는 노인에게 사건을 상담하는데.....
멋진! 아주 멋진! 매우 멋진! 국내 창작계에서 이걸 표준으로 삼으면 한국 남자의 외모 표준을 원빈으로 삼는 거나 다름없는 폭거가 될 것이다! 분량은 40페이지 남짓으로 짧은 편이지만 추리소설을 넘어 좋은 단편소설에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시간의 뫼비우스>는 환상성이 강한 작품. 에도가와 란포나 유메노 큐사쿠의 환상적인 작품이 생각난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시간회귀를 소재로 한 작품이며, 주된 정서는 후회와 회한. 추리 요소를 제하더라도 그저 ‘작가‘ 도진기의 진면목을 느끼게 되어 너무나도 행복했다.
여기까지가 각론. 내가 이 작가의 작품에서 압도적인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되는 건 아무래도 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잘 장악하고, 그걸 자신의 취향에 잘 합치시켜서 표현하기 때문일 것 같다. 이 점이 퀄리티와 이어지는 게 아닐까.
감탄했던 점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인간관과 세계관이 너무나도 건전하다는 것. 피 튀기는 기괴환상, 인간관계에서 쌓이는 악의 등을 다루고 있음에도 세상물정에 대한 통찰과 겸허함, 같이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 필터가 되어 건전하고 쾌적한 소설세계를 보여준다.
나는 왜곡된 필터,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뾰족한 이야기도 좋다. 그러나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어른 같은 이야기도 좋아한다. 도진기 작가의 책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그렇다고 고지식하지는 않다. 약간 삐딱한 장난기가 느껴지기에 비로소 ‘편안하다‘. 도진기 작가의 소설은 독자를 함부로 압도하려 하지 않는다. 읽는 쪽에서 제멋대로 우러러보고 기꺼이 압도된다.
장편도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단편 활동을 더 많이 보고 싶다. 배고픕니다! 좀더 많은 이야기를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