奇譚을 읽자! - 요즘 빠져드는 책

어쩌다 보니 일본 원서만 계속 읽고 있다. 번역본이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볼 텐데, 어쩌다 보니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이 다 번역이 안 됐다. 아직 안 된 책들도 있고 차후에도 가망이 없는 것들도 있다. 비율로 치면 후자가 훨씬 많은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원서 읽는 거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들다. 하지만 번역본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라는 것이 발명된 지는 엄청나게 오래되었고 - 신석기 혁명이 이야기의 기원이라는 설을 보았다 - 그만큼 그 종류도 많을 것이다. 근대소설뿐 아니라 다른 매체, 다른 장르로써 세련되고 진화하기까지 개중 숱한 갈래가 가지치기 당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이야기의 근원에 가깝고 오랫동안 살아남은 종류가 있다면 무엇일까? 내가 좋아하는 건 추리소설 종류이지만, 걔네들은 발명된 지 100년 남짓밖에 되지 않은 젊디젊은 가지다. 하지만 이 추리소설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로부터 비롯했다. 그것은 공포 이야기 - 무서운 이야기다.

무슨 내보일 만한 탄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무서운 이야기‘야말로 인류의 최초 발명품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의 이야기의 기원에 대한 연구들에 의하면 ‘이야기‘란 사람들 간의 정보 공유를 효율적으로 하기에 최적화된 포맷으로써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번개가 치는 날에 벌판에 나가면 벼락에 맞아 죽는다˝라는 정보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치명적인 정보다. 이걸 문자 그대로 평범한 술어문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한다. ˝예전에 우리 옆집에 아무개가 살았는데, 걔가 비만 오면 벌판에 나가 뛰노는 버릇이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하는 식으로 말이다. 상대의 감정이입을 유도함으로써 문제 상황을 대리체험시키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세상을 설명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써 이야기라는 형태가 요청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것보다는 정보 전달 면의 필요가 좀더 간절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보 전달적인 면에서 보면 뭐니뭐니해도 생사를 가르는 치명적인 정보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을까 한다. 긍정적인 정보보다는 부정적인 정보가 우선순위가 높지 않을까? 그편이 살아남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테고. 따라서 부정적인 정보를 ‘무섭게‘ 전달하는 이야기, 공포 이야기라는 것이 이야기의 기원에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감각적인 ‘무서움‘이라는 것은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두기가 되면서 점차 ‘괴기함‘, ‘기이함‘이라는 감각으로 세련되었을 것이다. 이 무서움, 기괴함, 기이함이라는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상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서 공포물, 기담, 추리물의 갈래가 나뉠 것이다. 추리물은 기이함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수렴한다. 기담은 기이함을 그 자체로 즐긴다. 셋 중 가장 관조하는 형태에 가깝다. 공포물은 무섭고 역겹고 불안한 상태로 사람을 몰아넣는다.

본격적인 공포소설보다는 역시 추리물이나 기담 쪽이 좋다. 나에게는 추리물도 기이한 이야기의 한 종류로 들어가 있다. 그래서 추리물을 읽을 때도 기이한 분위기의 완성도가 높다면 과학적인 고증이나 현실성이 좀 그렇더라도 뿌듯하게 읽는다. 항가항가

온다 리쿠는 추리소설 작가, 판타지 작가, 청춘소설 작가 등의 여러가지 라벨을 달고 있지만 나에게는 레벨 높은 ‘기이한 이야기‘ 작가다. 이 작가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추리소설 밭이겠지만, 2010년대부터였던가, 관록이 붙는 것과 동시에 추리소설 독자가 보기에는 기괴하거나 심심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경계가 된 작품은 아마도 <네크로폴리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에서는 환상적인 세계 속에서 기이한 분위기가 십분 연출되지만, 이야기가 ‘제대로‘ 수렴되지 않는다. 종반부에 무리하게 마무리짓다가 이제까지 쌓아 온 신비로움이 와장창 깨지는 느낌도 있다.

이야기를 끝내는 방법만 제대로 찾아내면 역사에 남는 환상소설가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뭐 잘 모르겠다. 차라리 완전히 몽환의 세계에서 비몽사몽하는 작품을 쓰면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기에는 이야기의 조리가 확실하게 서 있다.

그래선지 온다 리쿠는 기괴한 환상세계를 설정하는 작품보다는 현실적인 무대를 토대로 한 이야기 쪽이 독자 평가가 좀 더 높다. 나오키상을 탄 <꿀벌과 먼 천둥>도 그런 쪽인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기이한 이야기를 구사하는 작가로서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조리를 흐지부지하는 대신에 몽환의 경지를 풀어내는 작품이라고 하면 어제 막 다 읽은 나가노 마유미의 <아메후라시>. 이건 진짜 진짜진짜 이상한 이야기다. 뭔가 갑툭튀하면서 시작해서 전개도 갑툭튀, ˝엥? 왜죠??˝라고 물으면 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모티프들이 고도로 상징적이고 세련되게 쓰여 있어서, 가만히 읽자면 점점 세속적인 논리 회로의 출력이 약해지고 뭔가 논리 이전의 감각이 이야기의 흐름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 든다.

이야기는 ‘우즈마키 상회‘에서 일하는 세 남자를 축으로 한다. 사장인 키츠카와, 회계 겸 비서 겸 이것저것 다하는 만능직원 나카무라, 아르바이트생 이치무라다. 멋모르고 일을 시작한 이치무라는 다짜고짜 첫 일이라며 수상쩍은 가문의 딸과 혼례를 치르게 된다. 이치무라의 저항은 키츠카와의 협박에 막히고 만다. 그 협박이란 ˝내가 너의 혼을 붙잡았으므로 너는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키츠카와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에서 해결사 일을 하는 ‘아메후라시‘였다. 아메후라시는 사람이든 사람이 아닌 것이든 그 혼이 있는 곳을 파악하여 혼을 붙잡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절세미남 직원 나카무라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혼이 육체에서 빠져나가 다른 사람의 육체로 갈아타는 체질이었다. 그의 혼이 현재 머무는 육체는 수 년 전에 죽은 키츠카와의 연인의 것이다. 그리고 이치무라에게도 본인도 모르는 비밀이 있어서......

라는 이야기인데, 일단 셋 다 남자이지만 뭔가 비엘관계가 농후하다. 야하지는 않다. 그들의 언동에서 자연스럽게 이렇고 저런 관계나 사정이 드러나는 정도다.

단편연작 형식이지만 첫 에피소드가 엄청 노뜬금으로 시작하고, 마지막까지 ˝그, 그래서 도대체 이게 다 뭔데?!˝라는 느낌으로 끝난다. 추리소설 작가라면 장면과 장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의 빈틈을 논리적으로 메우고 싶어질 것이다. 개뜬금없이 진행되는 흐름도 어떤 ‘규격‘에 맞춰서 복선을 깔고 회수하고 설명하고 싶은 충동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개상의 정격 혹은 규격을 맞추지 않고, 자유롭게 환상의 세계를 짜내린 것이 이 작품의 독특함이고 ‘다움‘이다. 상당히 불친절하지만 결코 엉성한 작품이 아니다. 이 정도로 틀에서 자유로우면서 고도의 짜임새를 가진 환상소설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다.

이런 식으로 기이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어서, 이번에는 나카무라 후미의 <요미시>를 읽고 있다. 나카무라 후미는 <염마 이야기>라는 책이 번역 출간되어서 그걸 읽고 알게 되었다.

<염마 이야기>는 엄청나게 질이 좋은 판타지였다. <요미시>는 그것보다는 라이트한 느낌이 난다. 주인공이 요즘 젊은양반이라 그런지 어휘나 문장의 흐름이 쉽고 가볍다. 카도카와 호러문고에서 나왔지만 무서운 느낌은 없다.

주인공은 사람에게 앙화를 내리는 악신을 모시며 그것을 베는 ‘요미시‘인 타타라 카츠히코와 그의 저택에 가정부로 들어온 청년 고묘 아키라 콤비다. 아키라는 저주받은 가계에서 태어나 앞으로 수명이 몇 년 남지 않았기에, 홀로 남겨질 여동생을 위해 돈벌이에 필사적이다. 타타라 카츠히코의 저택에서 상주하는 가정부 일은 절호의 기회였지만, 봉급이 높은 대신 카츠히코의 ‘요미시‘ 일을 도와야 한다. 악신을 봉인한 상자를 열어 그들의 추억 속 세계로 넘나드는 요미시. 아키라가 처음으로 접한 상자 속 악신은 평범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는데... 라는 내용까지 읽었다.

일단 문장이 매우~ 읽기 쉬워서 살았다. 빡센 것들만 읽다가 이렇게 라이트한 걸 읽으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갑자기 독해능력이 쑥쑥 올라가는 기분마저 든다.

이 작품은 <아메후라시>처럼 호...호게모이! 같은 건 아니지만, 남자 둘의 관계 변화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마이너한 느낌이라 서평이 많이 없었지만 평자에 따라서 ˝결국에는 비엘이였습니다˝라는 의견도 보인다. 음... 관계변화가 어떻게 되기에 그런지 궁금하다. 빨리 다 읽고 싶다. 하지만 다 읽으면 그다음엔 뭘 봐야 하지? 아 읽을 거 많구나!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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