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 본격추리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소영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솔직히 이건 별점을 떠나서 "전설"급이다.
  표지를 언뜻 보고 "웬 배트맨이 창문을 기웃거리지? 배트맨이 란포랑 무슨 상관?"이라고 갸웃거렸다.
  물론 저 검은 실루엣은 고양님이시다...

  재패니즈 미스터리는 내가 한창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인 90년도 초반에도 꽤 꾸준히 국내에 유입되어 일정한 독자층을 확보해 왔다. 비록 정식계약작이 아닌 소위 '해적판'도 슬쩍 끼어들어 있었고, 기껏해야 매니아의 전유물 혹은 말초적인 삼류소설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 재패니즈 미스터리의 위상이 크게 상승되었다. 근래의 장르소설 붐도 일조하여(혹은 붐에 일조하여) 재패니즈 미스터리는 손에 꼽히는 거물급 작가의 이름과 한묶음으로 일종의 브랜드네임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무려 '전단편집'이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다는 것은 감히 '사건'이라 칭할 일이라 사료된다. 에도가와 란포는 재패니즈 미스터리의 시원임과 동시에 역사를 나타내는 아이콘이기에, 이를 수용한다는 것은 즉 그만큼 우리의 재패니즈 미스터리에 대한 수용의 깊이와 수준이 무르깊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로, 원색적 표지와 원색적 제목(대부분 번역 출판사 측에서 멋대로 바꾼)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책을 어른 몰래 보던 어릴 적과 격세지감을 느낀다.
  각설하고, 에도가와 란포의 저작들은 이전에도 여러가지 판본과 편집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주로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의 편집판으로, 개중에는 어린이용 책의 외장을 하고 거울지옥이나 우충 같은 단편을 끼워넣은 염치없는 판본도 있었다(아마 에도가와의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 섞인 미심쩍인 물건이었던 것 같다). 물론 전집이 정식 계약되어 출판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본서는 총 세권의 전단편집의 첫타를 끊는 1권으로, 본격추리를 테마로 원고지 200매 안팎의 작품을 선정했다(일본의 원고지는 400자 기준이라고 하니 우리식으로 환산하면 400매인가? 아니면 번역자께서 이점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물리적인 부피도 상당하지만 안에 들어있는 작품 역시 무려 22권으로 쾌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풍성하다. 게다가 대부분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 없는, 내지는 내가 이제껏 한번도 본 적 없는 작품들이라는 점은 커다란 매력 포인트다.
  걸작 "2전짜리 동전"이나 "심리시험", "D언덕의 살인사건"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명탐정 제1세대 아케치 코고로의 능청스런(?)모습이 돋보이는 "흑수단"이나, 은근히 호러블한 "유령"(죽은 사람의 얼굴이 사진에 커다랗게 찍혀 있는 대목은 꽤 섬찟하다), 란포 본인은 실패작이라고 궁시렁거리지만 꽤 읽는 맛이 있는 아이러니컬한 단편 "무서운 착오", 역시 란포 본인은 개그글은 자기 본령이 아니라고 발뺌하나 반전의 유쾌한 재미에 충실한 "입맞춤", 희곡투로 쓰여져 묘한 긴장감에 넘치는 "낭떠러지" 같은 작품들은 실로 이제껏 숨어 있던 게 아까운 절품이다. 특히 "영수증 한 장" 같은 작품은 제목처럼 영수증 한 장으로 대사건(?)을 밝혀낸다는 촌철살인적 발상과 허를 찌르는 기발함에서 요즘 작품들과도 비견할 만한 세련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굳이 본서의 "백미"를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기존에 소개된 유명한 작품들도 있지만, 나는 "석류"를 올리고 싶다. 맨 끝에 실린 본작은 분량도 다른 작품에 비해 두텁거니와, 란포다운 허를 찌르는 심리트릭은 물론 소설적인 재미도 뛰어나고, 무엇보다도 "새빨갛게 익어 터진 석류"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하필 '석류'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올린 데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찝찝함과 섬뜩함을 느끼며, 그것이야말로 란포 소설의 '맛'임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충실한 '부록'이다. 역자의 작가소개 페이지는 물론이고 일어 초심자를 위한 히라가나 표까지 붙어있다. 뭐니뭐니해도 에도가와 란포 본인의 코멘터리가 수록되어 있는 점이 대히트다. 작품에 자부심을 표시하는 대목도 많지만, 탐탁찮은 작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불평(?)을 늘어놓는 모습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 자신의 비교적 이지적인 본격추리물보다는 퇴폐적이고 환상적인 변격물에 더 호응하는 세간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모습에도 호감도 대폭상승이다. 나 자신 역시 변격적인 요소가 더 취향이라 그런 쪽에서 란포다움을 찾기는 하지만.
  문체와 연출 면에 있어서는, 물론 20년대의 작품인고로 큰 쇼킹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추리소설의 초심자와 일본 미스터리적인 '맛'을 즐길 줄 아는 독자라면 본서에 대해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일상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만하다. 물론 사람들은 많이 죽지만(....), 거창한 트릭을 구사하기보다는 인간 심리의 맹점을 교묘하게 찌르는 섬세함이 돋보인다.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는 말이 있다. 소위 '걸작' 역시 시간의 총애를 받는 아이라고 하겠다. 80년 세월에 걸쳐 사랑받아온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들이 우리나라 독자의 시간 속에서도 영원히 사랑받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