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544페이지라는 막대한 분량도 그 이유에 포함되겠지만 그것보다 전체적인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에 페이지 마다 읽는것에 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렇게 내가 가진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책 읽기에 어려움을 느낀 날이면 더더욱 '앎'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이 책은 치치스베오라는 지금은 사라진 이탈리아의 관습을 연구한 연구서다. 책을 읽으며 근대 이탈리아의 귀족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점에서는 참 흥미로웠다. 근대 이탈리아의 귀족의 결혼 관습, 상속 관습, 사교 문화 등등이 다양한 이야기들로 담겨있다. 또한 책 시작과 함께 소개된 그림을 통해 상상 속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계몽주의와 시민사회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예법이 확산되던 18세기, 이탈리아의 귀족 계급은 '치치스베오'라는 독특한 관습 혹은 현상을 만들어낸다. 이 특이한 사회적 페르소나는 대개 연하의 귀족청년에게 맡겨지는데, 그는 자신이 시중드는 귀부인의 집에서 환담과 오락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며, 그녀가 외출할 때는 항상 옆에서 보좌한다. - 16

치치스베오 활동이 어떻게 결혼을 한 부인에게, 부부에게 있어 가능한 일이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인생의 많은 순간을 시종기사가 남편을 대신해 귀부인과 함께하는 것은 빈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귀부인과 치치스베오 사이의 친밀함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성적인 방종이나 외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한 여성에게 다른 남성의 접근이 '공식적으로' 허락됐다는 사실은 놀랍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치치스베오의 선택과 활동은 가문과 가문 간에 그리고 남성 간에 체결된 협약의 결과물로서 정치적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중략) 일반적으로 귀부인과 치치스베오의 관계는 결혼으로 연루된 개인 사이 그리고 가문 사이의 결속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 193

실비오 펠리코는 이 기사에 90세가 된 어느 철학자를 등장시켜 그가 60여 년 전 1만 개에 달하는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을 관찰한 결과를 털어놓게 한다. 그에 따르면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37명,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는 22명 그리고 시종기사를 둔 아내는 8만 8000명" 이었다. - 153

그 당시의 결혼제도는 지금의 우리와 달이 정략제였기에 가문과 가문 사이에 정치, 경제적으로 필요에 의해 생겨난 관습이 아닐까 싶었다. 결혼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남성의 심리와 가부장제가 강했던 그 시절의 사회적 현실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여성들의 활동에 제약이 많았기에 남편들의 입장에서는 아내를 감시하는 역할로 인식할 수도 있었고, 또 한편 아내의 입장에서는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치치스베오를 통해 그나마 짧은 일탈, 자유 등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시종기사라는 제도가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 제도는 장자가 아닌 남성에게 일종의 일거리를 제공한다. 이 제도는 젊은이가 잘못된 사람을 사귐으로써 치명적인 방종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 (중략) 시종기사가 아닌 젊은 남성은 성격이 좋지 않고 자유로운 성관계를 즐기거나 혹은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다. - 157

도박 그리고 이성과의 잘못된 만남은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막 사회에 발을 디디려 하는 귀족 남성에게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특히 타락한 여성이 남성을 꼬드겨 결혼이라도 계획하게 된다면 가문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재앙이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을뿐더러 귀족 사회의 관습에 능통한 유부녀와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은 탈선을 막는 보호 장치였다. - 158

'시중을 든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사교 모임에 홀로 갈 수 없는 귀부인은 바깥 외출을 위해서라도 치치스베오가 필요했고, 치치스베오는 물론 모두 귀족 출신이었으며 오히려 귀부인사이에서  선택과 거절을 할 수 있는 '갑'의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결국엔 서로의 필요하게 그 만남이 이루어진 관계라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다.






이런 놀랍고 흥미로운 관습이 생겼고, 그럼에도 한세기만에 사라진 이유는 무엇이었을지가 궁금해졌다.

아내의 몸과 마음이 다른 남성에게 있다는 사실을 지켜보는 고통 외에도 여성의 부정은 당대의 귀족 사회에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바로 자녀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문제였다. - 411

신분이 높은 귀부인과 이 관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는 로마에서 치치스베오가 늘어난 이후 살인 사건이 감소했다고 말했다. 이 관습이 비록 종교적으로 축복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로마 교황이 이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교황은 이 관습을 금지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실 치치스베오는 두 번째 남편과 같은 존재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부인, 그렇다면 남편은 아이들이 친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아내의 아들이라는 것만 알 수 있으면 된 것이지요. " - 434


점차적으로 치치스베오는 사회적 혼란을 불러왔다. 하층 계끕의 여성들 역시 치치스베오를 두고 싶어했을 것이며, 결혼 전 여인의 가난했던 애인이 후에 치치스베오가 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위 글에서처럼 점차적으로 핏줄의 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며 사회적으로 이러한 관습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시민혁명으로 사교문화가 쇠퇴하며 치치스베오라는 관습역시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얘야, 세 세대에 걸쳐 살았고 남자에 대해서도 여자에 대해서도 잘아는 이 나이 많은 할머니 얘기를 좀 들어보아라. 결혼과 사랑은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단다. 사람들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하고 가정이 모여 사회를 만들게 되지. (중략)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면 각자의 수입과 부동산을 합쳐야 하고 함께 살아야 하고 부와 자녀라는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단다. 얘야, 사람들은 단 한 번만 결혼을 하는데, 세상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살면서 스무 번도 넘는 사랑을 할 수 있지.  본능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단다. 알다시키 결혼은 법률이고 사랑은 본능이란다. - 440

책에 소개된 이 글은 모파상의 소설<옛 시절>이다. 나이 많은 어느 귀족 여성과 그녀의 손녀를 통해 18세기와 19세기의 성도덕 관념을 대비하고 있다. '결혼은 신성한 것이예요' 라는 손녀에게 자신의 시대에는 관대한 태도가 자연스러웠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이 글을 통해 치치스베오가 잠시 머물던 18세기를 한번더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이어읽는 책으로는 '옛 시절'이 수록된 <모빠상의 사랑> 으로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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