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올라갈 무렵, 그리고 스무살 쯤이었나.
그동안 썼던 일기, 편지 등을 모두 태운 적이 있다.
이유는 내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아서.

편지를 정리할 때는 정말 버릴 거냐고 내게 물었는데, 아주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버렸다.
그냥 싫었다.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스무살 이전의 추억 같은 게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랑 친구였는지, 어떤 이야기들을 했었는지 등등.

추억 같은 게 없어져서라기 보다, 예전의 나를 돌이켜보려고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를 생각할 때, '나'를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그러면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를 생각했을 때 예전의 멀쩡(?)했던 내 모습을 기억하며, 앞으로의 '나'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 좀 막막하다.

요즘 일기를 매일 쓴지 5일 정도 됐고, 중간에 하루 거른 걸 제외하면 9일 쯤 됐다.
전에는 일기라는 '형식'을 많이 생각했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쓰는 것에 신경을 쓰다가 지치기도 하고. 그렇게 하루 쓰고 안 쓰고.

그런데 최근엔 생각을 정리해보자라는 개념으로 시작한 거였는데.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연재하는 김연수의 곰곰이 생각해보니를 보다가 카프카의 일기에 대한 부분이 언급된 것을 보았다.

"정말 많이 삭제하고 지워버렸다는 사실, 그래, 올해에 쌌던 글이란 글은 거의 다 지워버렸다. 지워버린 것은 정말 하나의 산을 이루었는데, 내가 전에 썼었던 글보다 다섯 배는 더 많은 것이며, 이미 그 지워버린 양으로 내가 쓴 글 전부를 펜 밑에서 빼앗어버린다." (카프카의 일기, 110쪽)

(출처: 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sntn_id=12883)

형식에 얽매여 나무만 바라보다가 숲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지난 날이 떠올았다.
이 글을 보고 그간 내 공간에서도 쉬이 마음 놓지 못했던 지난 날에, 조금 위로가 되었다.

지금은 어차피 내 일기인데 그냥 내 마음대로 쓰면 되지! 라며, 펜을 잘 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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