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 논어 ⟫ 에 담긴 생각은 이미 죽었다. ⟪ 논어 ⟫ 의 언명은 수천 년 전에 발화된 것들이고, 그 발화자와 청중은 오래전에 죽었으며, 그 언명에 원래 의미를 부여하던 맥락들 역시 역사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한 ⟪ 논어 ⟫ 의 내용을 살아 있는 고전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 논어 ⟫ 와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오랜 시간과 맥락의 간극을 무시하는 일이다. p11

생각의 시체가 주는 이 서먹함을 즐기기 위해서는 서둘러 고전의 메시지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들지 말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콘텍스트의 경관을 꼼꼼히 감상해야 한다.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달리는 동안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진 웹스터, ⟪ 키다리 아저씨 ⟫ 중에서) p16

대신 콘텍스트가 주는 경관을 주시하며 생각의 무덤 사이를 헤매다 보면 인간의 근본 문제와 고투했던 과거의 흔적이 역사적 맥락이라는 매개를 거쳐 서먹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오래전 죽었던 생각이 부활하는 사상사적 모멘트moment이다. (...) 그렇다면 고전을 왜 읽는가? (만병통치약도 아닌데... 다만!)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p17

텍스트 정밀 독해의 관건은 정식화된 절차를 적용할 줄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독해를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 텍스트를 잘 읽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p22

텍스트 정밀 독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정식화된 절차를 외우는 대신, 상대적으로 더 훈련된 감수성을 지닌 독해자를 만나 그와 더불어 상당 기간 동안 함께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열고 단련해야 한다. p23

침묵도 일종의 발화로 간주하며 텍스트를 읽어보라(...) 그렇다. 침묵이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낭독이자, 들을 수 있는 정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침묵을 듣기 위해서는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 이처럼 관점을 바꿀 수 있게 되면, 이제껏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집중했던 학생은 텍스트가 무엇에 대해 ‘구태여‘ 침묵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좀 더 예민한 독해자가 된다. p25-27

침묵을 매질로 삼은 메세지는 그에 걸맞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독해자를 요청한다. p29

(...) 로크가 그런 관행에 대해 철저히 ‘침묵‘함을 통해 그 관행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로크의 침묵을 이해하려면, 로크의 해당 저작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당대의 언어적 콘텍스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p34

바람직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소통과 해석을 가능케 하는 바탕을 공유하고 유지하는 일이 필요하다. 소통과 해석의 질은 곧 정치의 질이기도 하다. p61

삶에는 지름길이 없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은 가야 한다. p68

좀 더 광범위한 독서가 필요하다. (...) 하다 보면, 자칫 사상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에 눈감게 된다.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느닷없는 천재나 악마는 사실 드물다. p70

당대의 자료 속에 들어가 보면, (...) 공자는 그가 속한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를 사유했던,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 궁핍한 시대에 살면서 마주한 현실의 문제와 고투했던 당대의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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