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탐욕은 불평등을 만드는 질병이다.

처음부터 책은 심각하다. 세계 상위 10 %에 있는 부자들은 세계 부의 85%를 차지하고, 하위 50%는 세계 부의 1%만 차지한다―라는 증명은 가슴이 쓰리다. 주변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 천지다. 잘 사는 이들의 행태는 예나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자본이 민주주의와 결합되면서 빈곤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탐욕에 맞춰진 자본은 일반인을 노예로 만들고, 그들이 생산한 제품을 다시 사용하게 하는 악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이윤추구가 동시에 공익을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라는 이 주장은 사실상 거짓으로 밝혀졌다, 라고 책에서 굵은 글씨로 호소하고 있다. 개인의 이윤추구가 곧 탐욕이 공익인가? 라는 설정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고, 회복되지도 않은 시장경제를 더 병들게 하고 있다. 모든 자원을 깡끄리 써버리겠다는 이상한 심보의 모습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속성 중 하나는 파괴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왔다.

불평등을 주제로 잡은 까닭에, 루소의 <사회불평등 기원론>을 한번 훓어보아야 한다. "다수의 사람들은 생필품도 갖추지 못한 채  굶주리며 살아가는 파국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 라고 한 루소는 당시에 위험한 생각을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용감했다고 본다. 허나 탐욕을 이기심이라는 단어로 순화시키면서 자연계는 지배의 대상화가 되어 점점 타락이 되어갔다. 자본은 자연을 가공하면서 나타난 잉여물인데, 그들은 인간에게도 자연에게도 잉여가치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자본과 탐욕에 대한 지적은 숱하게 나왔지만, 입을 닫았던 까닭에 금융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탄생시키지 않았던가. 그 금융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데아의 산물이고, 본질이 있다는 일자에 기인한다.

"우리의 세계가 원래부터 서로 경쟁하는 경제 주체들로 갈라지도록 만들어 있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경쟁적 경제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이다." ― 존 쿳시 John M. Coetzee, p45

이는 경쟁을 한다는 현상에서 보자면 끝임없이 분열해야 마땅하겠지만, 그 끝에서는 통합을 하는 게 역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본은 통합이라는 과정을 인간적이지 않게 한다. 이기심으로 작동되는 자본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면서도, 기본적인 인간적인 성찰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좋은 제품이 과연 우리의 삶을 행복에 이끌어주는가? 라는 질문은 그들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싼 가전제품들이 꽉 들어찬 공간에서 살아야만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가? 지금의 시대는 문명도 문화도 아닌 제품의 시기라고 봐야 더 어울린다. 몇몇 기업들이 비슷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그것을 쓰지 않으면 왕따를 당하는 문화와 중독을 조장하고, 다시 소외를 만드는 일들은 자본의 어두운 면이다. 자본의 축적은 곧 자연을 회복불가능한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식주를 넘어서는 거의 모든 것들을 가치로 묶어놓은 현 시대의 문화는 대단히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이 대량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 것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면서였다. 경제적인 이익을 막대하게 얻기 위한 서구의 모습은 괴물의 그 자체였지, 문명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해오곤 했다. 그 사실을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았기에, 노예무역이 금융자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서구만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역사적 사실이 있지만, 서구만큼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것은 인간을 사고 파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비의 방식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불평등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것도, 거의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이는 소수의 투표권을 가진 경제 기득권자와 같은 파급력을 지닌 불매운동으로 전개해야만 불평등을 해소시킬 수 있다. 불평등의 사회를 만든 이 자본주의의 변화는 현재 전자사회로 바꾸어놓았다. 더 많이, 더 빠르게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나아지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삶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

책의 내용은 상당히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다. "(금융기관과 신용 제공기관들에 대한) 탈규제와 이 기관들의 주식회사로의 전환은 금융 산업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보수와 커미션과 보너스를 제공해주는 또 하나의 노다지판이었던 것이다.―p65" 라고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가 금융산업으로 떡칠이 된 것은, 민주주의의 시작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민주주의에서도 노예는 존재했었지 않았던가. 그러한 노동력의 착취가 사라지지 않고,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는 금융산업을 멀리할 수 없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생존인데, 생존보다는 이질적인 가치에 더 투자하게 하는 자본사회로 변질된 민주주의는 반성을 해야만 한다.

제4장 말과 행위 사이의 간극에서 <탐욕>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본다.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같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실로 섬뜩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시도해보지 않는 한, 거듭해서 그리고 더욱 더 열심히 시도해보지 않는 한, 그 생각이 틀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p115"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묵직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탐욕은 질병이라고 필자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었으며.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