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아도 어려울 것 같은 책들을 몇 권 읽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과 <운명>은 사뭇 흥미진진한 구석이 있었고, <정의란 무엇인가>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는 약간의 부담이 있었으되 활발히 생각하도록 만드는 데가 있었으며, <제5 도살장>은 넘치는 은유를 해석해내기가 난망한 가운데에서도 책 전반에 넘쳐 흐르는 냉소적 유머에 혹하는 매력이 있었으며, <동물농장>은 시종일관 유쾌했다.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게 마련이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전혀 슬프지 않으면서 그저 짜증스러웠고, <희망의 인문학>은 아마도 좋은 책이겠지만 내게는 어렵고 어려웠으며 또한 어려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은 남아공 월드컵이 개최되던 해에 발간된 책으로, 남아공과의 관련성 때문에 월드컵 당시 약간의 관심은 있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읽을 생각이 없었다. 첫째, 이 책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로벤섬 수용소에서 이루어진 축구에 관한 이야기로, 원제가 시사하듯이 '단순한 경기 이상의 것(More Than Just a Game)'이라 결코 쉽지 않을 것이고, 둘째, 나는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어쨌거나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 발간되는 축구 관련 도서에 대해 관심만큼이나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 제프 블래터 FIFA 회장의 추천사로 이 책이 시작한다는 것이 굉장히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부연하자면 나에게 제프 블래터는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 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이 책을 반값에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그리고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 가장 잘한 일이었다.
생각했던 대로 책이 쉽지는 않았다. 민방위 교육을 받으러 가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때때로 차라리 민방위 교육 내용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낯선 이들의 낯선 행적이 여기저기서 이루어지는 터라 쉬 집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러한 낯선 이들의 낯선 행적의 결과로 그들이 로벤섬 수용소에 모여들자 상황은 일변했다. 힘을 합쳐 축구협회를 조직하고 축구리그를 운영하는 과정은 대단히 흥미진진했고, 축구를 매개로 그들의 자존감을 되찾는 모습 또한 흥미로웠다. "축구가 로벤섬의 축구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라는 제프 블래터의 말은 여전히 터무니 없는 과장 혹은 영혼없는 찬사로 들리긴 하지만, '단순한 경기 이상의 것'을 이루어낸 로벤섬의 축구인들과 축구의 상호작용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문재인의 <운명>은 대체로 재미있게 읽혔는데, 특히 '인사(人事)'에 관한 대목이 흥미로웠다. 조금이라도 해당 직위에 어울리는 사람을 공정하게 선정하기 위한 노력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감동을 전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올바른' 인사에 대해서는 시각 차이가 존재하기 마련이며, 또한 올바른 인사가 모든 좋은 결과를 담보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인사'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원칙을 가지고 사람을 선정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본인이 직접 관여한 일에 대해 본인의 입으로 말하다 보니 비판에 대한 변호가 자칫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는 듯한데, 나는 그다지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의외로 재미있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시작부터 던져지는 논쟁적인 질문, 일견 당연한 듯 보이는 정의(正義), 그에 대한 만만치 않은 반론. 마이클 샌델은 어느 한쪽의 견해를 지지하지 않은 채, 대립되는 견해 모두에 대해 다양한 논거를 제시하여 어느 한쪽이 확실히 옳다라는 말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쉽게 생각하는 순간, 샌델은 또 다른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해답을 미궁으로 빠뜨린다. 풍부하게 제시되는 사례 속에서 정의는 고정된 무엇이 아닌, 마치 가면을 바꿔쓰고 나타나는 연기자처럼 느껴질 정도고, 그러한 과정에서 독자는 깊이 사고(思考)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사고가 주는 기쁨이 작을 리 없다.
윤구병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는 사실 한 번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책이다. 나는 어지간해서는 읽던 책은 어쨌건 끝까지 보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지간히도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마음 먹고 읽기 시작해서 뒤로 갈수록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특히 교육에 관한 내용은 교육 관련 종사자나 혹은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라면 거듭해서 읽고 생각하기를 반복해도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좋았다. 물론 나는 교육 관련 종사자도 아니고 기르는 아이도 없기 때문에 이 책을 거듭 읽을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아주 없지는 않다(다시 말하거니와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기르는 아이가 생겼을 때 다시 이 책을 들춰보게 된다면 정말 다행한 일이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앞서 얘기한대로 전혀 슬프지 않으면서 그저 짜증스러웠다. 일단 베르테르의 사랑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고, 그가 끝내 비극을 택한 것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단지 도무지 베르테르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그 상대인 로테도, 그녀의 남편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더욱이 인물들이 하게체와 시오체(?)를 주구장창 남발하는 것도 읽기 괴로웠고, 간혹 웬 서사시(?)를 주인공들이 함께 읊조리기라도 할 참이면 손발이 오글거려서 진짜 책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시대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니 어지간하면 그러려니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는데, 이 책은 내 이해의 범주를 지나치게 넘어서는 책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장점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은 굉장히 좋았다. 쉬운 내용에 직관적인 비유, 그리고 짐작할 만한 결말이 위트 넘치는 문장과 잘 짜여진 구조, 오웰의 깊이 있는 통찰력과 만나 하나의 완전체가 된 듯한 느낌이다. 쉽고 가볍게 읽을 만하지만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내용이고, 간단치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나 술술 재밌게 잘 읽힌다.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는 '고전'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고 완전히 납득을 하게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ㅡ<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는 반대로ㅡ책 내용이 너무 짧다는 것인데, 이건 그저 훌륭한 책에 대한 일종의 찬사일 뿐, 사실을 말하면 나는 짧은 책을 좋아한다. 그러니 간단히 말해서 나에게 <동물 농장>은 최고였다.
마지막으로 <희망의 인문학>과 <제5 도살장>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두 책 모두 내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희망의 인문학> 같은 경우에는 워낙 여기저기서 좋은 평을 하는 것을 봤고 외삼촌이 구태여 안겨주신 책인데다가 직전에 읽은 <지식e - 시즌4>에서 클레멘트 코스가 다루어지기까지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역자들이 먼저 읽으라고 친절히 일러준 부분이 나올 때까지(물론 나는 무조건 차례로 읽는 스타일이라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정말 힘들게 읽어야만 했다(다행히 이후 사정이 조금 나아졌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제5 도살장>의 경우에는 커트 보네거트의 재기넘치는 '농담'과 '은유'를 제대로 알아듣기에는 내 배경지식과 이해력이 너무 부족한 듯했다. 그저 이런 책들 같은 경우에는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라면 뭐 그저 <제5 도살장>에 주구장창 나오는 대사 한 마디를 따라할 도리밖에 없겠다. "그렇게 가는 거지."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특히 <희망의 인문학>은 내게 너무도 어려워서 '그렇게 가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