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맛있는 것과 덜 맛있는 것 중에서,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과 덜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한결같이 '맛있는 것을 아껴 먹으라.'는 교리를 충실히 신봉해 마지 않는 쪽이었다. 나는 어릴 때 핫도그를 먹을 때면 껍데기(?)를 먼저 다 먹고 나서 소시지만 나중에 먹었고, 아이스크림 누가바를 먹을 때도 역시 껍데기(?)를 먼저 먹고 안의 아이스크림만 나중에 먹곤 했다. 지금은 물론 그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가령 떡볶이의 떡과 오뎅이나 혹은 새우초밥과 알초밥의 경우처럼 기어코 양자택일의 순간이 오면 역시나 더 좋아하는 쪽을 나중에 먹는다.
책을 읽을 때에도 이런 습벽은 여전히 유지된다. 만약 이런저런 이유로 당장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두 권의 책을 샀다면 웬만해서는 좀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을 나중에 읽는 편이다. 이유는 덜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이유와 같다. 덜 당기는 것을 먹거나 읽고 나서 더 당기는 것을 먹거나 읽기는 쉽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그리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는 것과 읽는 것의 중대한 차이점은, 먹는 것의 경우에는 이미 그 맛을 알고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읽는 것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재미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고, 재미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재미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굉장한 기대를 품고 아끼고 아끼다 읽은 책인데 약간 실망스러웠던 경우다. 초반엔 무척 좋았다. 애팔래치아 산맥을 종단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와중에 그가 보여주는 과장된 너스레는 유쾌했고 간간히 인용하는 통계는 흥미로웠으며 다시 등장한 빌의 친구 카츠도 반가웠다. 하지만 정작 애팔래치아 산맥을 종단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지루하게 느껴졌다. 여전한 너스레와 과도한 통계, 그리고 항상 희화화되는 카츠. 어느 부분이 별로였다고 딱 고집어 말하기엔 이제 이 책을 읽은 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예전에 빌 브라이슨을 두고 "실오라기 하나에 대해 이야기해도 재밌는 작가"라고 말하는 평가에 동의했지만 이제 그건 좀 지나친 듯하게 느껴진다는 것(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건 당연하다). 뭐 물론,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빌 브라이슨이 여전히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작가임에는 분명하지만.
김혜리의 <영화야 미안해>는 내가 이 책을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며 아껴왔었던 책이다. 책에서 소개된 영화를 한 편이라도 더 보고 나서 책을 집어들 요량이었던 것. 하지만 그때를 기다리다간 평생 이 책을 못 읽을 것 같아서 결국 책을 읽었다. 영화를 특별히 즐기지 않는 탓에 책에서 말하는 영화와 배우들은 그리 익숙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저자의 글솜씨가 훌륭해서 책을 읽어나가는 일은 사뭇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혹 본 영화라도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고, 저자의 글의 적확함과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책에 나오는 영화를 하나 하나 감상한 뒤에 다시 이 책을 읽어보고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내게 거의 불가능한 일일 듯하다. 그보다는 그냥 다른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집어드는 편이 훨씬 간편할 테니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는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조르지오와 카를로가 나왔을 때는 약간 불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꽤나 좋아했던 작가인 하루키의 작품을 멀리하게 된 건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비이성적인 일들 때문이었는데, 조르지오와 카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머릿속에 사는 벌들이고 나는 그 존재를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등장은 잠깐일 뿐 곧 유럽 이곳저곳에서의 생활이 펼쳐졌고, 글은 술술 읽혔다. 소설이 아닌 탓에 어떤 정교한 무대는 필요치 않았고, 그저 소소하고 세밀한, 동시에 이국적이면서도 특별한 일상이 하루키의 활달하면서도 세속적인 느낌의 글과 만나 맞춤한 듯 어울렸다. 생각해 보면 하루키의 소설은 재미있게 읽고 나서도 대관절 소설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비해, 에세이는 그와 같은 어떤 '의미에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훨씬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간단히 말해 내게 하루키란, 맥주를 왜 마시는지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하지만 그저 맥주를 마시고 싶게 만드는 탁월한 작가이고, 때로는 그거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