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유럽 축구 시즌이 막바지로 향하던 작년 4월의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느 축구팬이 1년이 지난 올해 5월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그는 깨자마자 으레 그렇듯 주요 유럽 축구리그의 우승팀을 확인하게 될 것인데, 그때 그가 좀 더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1년 이상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잠깐 눈치 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08-09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우승팀은 지난 2년간 그랬던 것처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고, 이탈리아 세리에A의 우승팀은 지난 3년간 언제나 그랬듯 인터밀란이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비록 작년과 달리 바르셀로나가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역시 그가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여길 한 달 동안에 충분히 일어남직한 결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이러한 가정의 핵심은, 4월쯤이면 우승 가능한 팀이 몇몇 특정 팀으로 압축되고 5월이면 그중 하나가 우승을 차지하는 일이 거의 매년 유사하게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시야를 조금 넓혀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맨유와 바르셀로나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했다든지,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국왕컵에서 우승을 했다든지, 첼시가 FA컵에서 우승을 했다든지 하는 따위의 소식들도 전혀 놀라울 것 없는 결과들이다. 거의 모든 것이 매년 4월에서 5월 한 달 사이에 일어남직한 진부한 일들뿐이다. 이쯤 되면 "축구는 22명이 90분간 경기를 치러 결국에는 항상 독일이 승리하는 스포츠다."라고 한 게리 리네커의 말을 살짝 바꾸어서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20개의 팀이 팀당 38경기를 치러 결국에는 항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우승하는 리그다." 물론 이것은 꽤나 비약이지만, 적어도 최근 3년간은 언제나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른 리그나 대회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특히 우승팀은 언제나 몇몇 특정 팀 중의 하나라는 식으로 범위를 조금만 확장하면, 이것은 거의 '공식'에 가깝다).  


[사진 =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을 든 퍼거슨. 이 사진은 2009년 것이지만, 2007년이나 2008년의
것이라고 해도 전혀 상관없다. (C)게티 이미지]

주요대회에서 언제나 우승을 하는 팀들을 살펴보면, 그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승을 일삼는 팀들은 훌륭한 시설과 최고의 선수들 그리고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최고의 팀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막강한 '돈'의 위력이다. 가령 위에서 언급된 팀들을 예로 들면, 올 시즌을 앞두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베르바토프를 영입하는 데 3000만 파운드를 썼고, 인터밀란은 콰레스마와 문타리를 영입하는 데 4500만 파운드 이상을 쓴 것으로 추산되며, 바르셀로나는 다니엘 알베스와 흘렙, 케이타를 영입하는 데 약 5000만 파운드를 썼다. 여기서 해당 선수들이 실제로 올 시즌 팀의 우승에 얼마나 결정적인 기여를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각 팀들이 이처럼 엄청난 돈을 매년 지출하면서 전력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고, 이것은 '돈'이 각 팀들의 전력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심지어 '마법'을 무시로 부리는 것처럼 보였던 거스 히딩크조차도 최근에 첼시가 맨유와 우승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슬픈 일이지만, 요컨대 축구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있는 '마법'이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올 시즌 가장 의외의 이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호비뉴의 맨체스터 시티 행은 개인적으로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펠레는 첼시가 아닌 맨체스터 시티를 택한 호비뉴를 두고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많은 사람들이 호비뉴를 '돈'에 팔린 선수로 매도했지만, 까놓고 말해서 축구선수의 가치를 결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돈'이라는 것과 팀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돈'을 써야한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더욱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팀이었던 첼시가 러시아 갑부 구단주의 '돈'을 앞세워 프리미어리그의 강자로 발돋움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인데, 그러한 첼시로 가는 것은 되고 이제 첼시보다 더 부자가 되어 첼시의 선례를 따르려고 하는 맨시티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호비뉴가 비난을 받아야만 한다면, 그건 그가 여전히 발전단계에 있는 맨시티의 행보를 기다리거나 혹은 이끌어가지 못하고 인내심의 바닥을 보이는 경우, 그리고 맨시티에서 프로답지 못한 행동을 보일 때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려 수십 조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알 파힘을 새로운 구단주로 맞이한 맨시티의 돈지랄(?)도 심정적으로 마뜩찮게 보일 수는 있지만, 현재 축구계의 생리가 그러한 이상 일방적으로 맨시티만 비난할 일도 아니다. 굳이 비난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축구계에 지나치게 많은 돈이 오간다는 사실 그 자체여야만 할 것이다. 즉, 비판의 대상에는 세계 유수의 클럽들이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진 = 맨체스터 시티의 새 구단주 알 파힘의 얼굴이 들어간 지폐(?). 행여라도 이런 얼굴과 마주한다면 반드시 맨체스터 시티의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게 좋다. (C)게티 이미지]

실제로 맨체스터 시티의 지역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지금껏 이적 시장에서 썼던 이적료를 살펴보면 팀의 명성과 성적이 돈과 갖는 함수관계가 비교적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맨유가 세계적인 클럽이라는 것은 맨유가 부유한 구단이라는 말과 같고, 이는 곧 맨유가 이적 시장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 맨유의 '캡틴'이었던 로이 킨은 1993년 당시 리그 최고 이젹료인 375만 파운드를 기록하며 맨유로 이적해왔고, 1998년 맨유가 야프 스탐을 데려올 때 쓴 1075만 파운드는 당시 수비수로서는 역사상 최고의 이적료였다. 그리고 2001년 베론의 영입을 위해서 쓴 2800만 파운드도 당시 리그 신기록이었으며, 2002년 리오 퍼디낸드의 영입을 위해 쓴 약 3000만 파운드는 퍼디낸드를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비수로 만들어 주었다. 또한, 2003년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할 때 쓴 1200만 파운드는 당시 10대로서는 최고 이적료였고, 이듬해 영입한 동갑내기 웨인 루니의 경우에 이적료는 약 2700만 파운드에 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요약하자면, 맨유가 세계적인 클럽으로 성장한 이면에 막대한 돈의 투자가 있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것은 다른 세계적인 클럽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세계적인 팀들이 뛰어난 선수들을 구성해 좋은 성적을 내고, 이로써 다시 구단 수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현명한 판단이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그리 부유하지 못한 팀들은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하지 못하고(혹은 뛰어난 선수를 계속 팀에 잔류시키지 못하고), 결국 떨어진 성적이 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구단 수입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즉, 부유한 구단은 선순환으로 인해 언제나 강세를 유지하고(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수입을 얻은 팀은 맨유다), 가난한 구단은 악순환으로 인해 언제나 약세를 면치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리미어리그의 경우 더 많은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챔피언스리그에 나가는 팀이 이른바 '빅4'가 아닌 경우를 상상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바로 이러한 현실 하에서,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수단이 '돈'이다. 적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돈을 소유한 구단주가 팀을 좀 더 높은 수준으로 이끌 야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돈을 쓰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것은 결코 반칙이 아니다. 

그렇다면 '돈'으로 우승을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이쯤에서 '돈'의 영향력 밖에서 이루어진 몇몇 의미 있는 사례들을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축구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칼레의 기적'은 축구에 있어서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난방기구 수리원과 부두 노동자, 정원사 등 아마추어 선수들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클럽 칼레는 2000년 프랑스 컵에서 프랑스 유수의 프로 클럽들을 모두 꺾고 결승에 진출해 낭트와 맞붙게 되었다. 결과는 이미 잘 알다시피,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칼레는 페널티킥을 내주며 1대2로 패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이 그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결승 경기 전 어느 여론조사에 의하면, 설문대상인 18세 이상의 성인 1000명 중의 61%가 칼레의 승리를 희망했고, 그들 중 85%는 "칼레는 축구의 모든 것을 돈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칼레를 "인간의 얼굴을 한 축구의 수호자"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한편, '칼레의 기적'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올 시즌에도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오직 스페인 바스크 지역 출신 선수만 영입하는 방침을 현재까지도 바꾸지 않고 있는 스페인 1부리그의 아틀레틱 빌바오는 스페인 국왕컵 결승전까지 진출하여 결국 바르셀로나에게 1대4로 패한 것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칼레와 아틀레틱 빌바오는 패했지만, 그것은 축구에서 결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의미 있는 패배였던 것이다(올 시즌 프랑스 컵에서는 2부리그 팀인 갱강이 결승전에서 1부리그의 스타드 렌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진 = 칼레와 낭트의 2000년 프랑스 컵 결승전. 왼쪽이 칼레의 선수이지만, 필드 위에서 누가 많은 돈을 받고 누가 적은 돈을 받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C)게티 이미지]

1970년대 리버풀의 전성기 시절 리그 우승에 기여한 바 있던 수비수 래리 로이드는 당시를 "대부분의 팀들에게 우승 가능성이 있던 시기였다. 돈으로 우승을 사는 팀들은 없었다"라고 전한다(<포포투> 5월호 참조). 이 말이 현재의 축구계에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렇다. 현재의 축구계에는 돈으로 우승을 사려는 팀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현실적으로도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다. 명백하게도, '돈'은 '우승'을 얻는 데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팬들은 축구에는 여전히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들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의미 있는 패배일 수도 있고, 놀라운 기적일 수도 있으며, 혹은 아름다운 게임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둥근 축구공'은 구르게 마련이고, 아무리 많은 돈이 있다한들 축구공을 네모나게 만들거나 혹은 구르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진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진실이야말로, '돈'으로 우승을 살 수 있는 시대를 맞은 우리가 여전히 축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축구에서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고, 둥근 축구공이 구르는 한 "인간의 얼굴을 한 축구의 수호자"는 언제고 또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이것만큼은 돈으로도 어쩔 수 없다.

ps. 이적료는 비공개인 경우도 있고, 몇몇 옵션에 따라 금액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어서 다소의 오차가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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