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7>
아침에 일어나서 곧장, 바로 옆에 위치한 선암사를 찾았다.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비 내음을 잔뜩 머금은 아침 공기는 무척이나 서늘하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선암사를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서,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3명의 또 다른 일행만 눈에 띌 뿐이다. 물론 그 덕분에 모기의 집중적 타깃이 되긴 했지만.
선암사에 들어가서는 언제나 그렇듯, 이곳의 최고 어르신인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대웅전에 먼저 들렀다. 가볍게 3배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누나가 어느 절이든 부처님 눈 앞의 경관을 가장 신경 써서 가꾼다는, 제법 신빙성 있는 정보를 알려준다. 딴은 그럴 듯하게 여겨져, 부처님께 잠시 양해를 구하고 대웅전의 한가운데서 경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좀 달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선암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해서 무슨 구체적인 감상을 말하기는 어렵다. 매우 오래된 절의 정취가 한껏 묻어난다는 점만을 겨우 감상이랍시고 내뱉을 수는 있으나, 내 무지는 그 이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변명하자면, 그 놈의 모기가 아주 극성이라 끓어오르는 살심을 참는 것만도 힘겨웠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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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의 과분한 환송을 받으며 선암사를 내려와서는, 늦은 아침을 먹고 송광사로 향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는 차로 약 20~30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그 길이 정말 환상적이다. 때마침 해가 살짝 모습을 내밀어서 비로 씻어낸 듯한 투명한 세상을 한결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도로 양 옆으로는 나무가 끝도 없이 도열해 있고, 도로 오른편 밑으로는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다. 창문을 활짝 열어서 비와 나무와 바다의 냄새가 섞인, 그 미묘한 청량감을 마음껏 들이 마신다.
송광사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광사 경내에 들어서니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잠시 비를 피할 겸 대웅전으로 들어가 마치 득도한 고승마냥 금강경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여전히 비는 하염없이 내리 붓고 송광사는 빗소리에 파묻혀 적막하기만 한데, 내가 입 밖으로 내는 금강경의 구절만이 내 귀에 들어오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비가 끝도 없이 내려도 크게 상관없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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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독송을 마치고 지루한 줄도 모르고 송광사 경내를 바라보는데, 스님 한 분이 우산을 쓰고 종각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신다. 그리고는 이내, 우아하고 힘찬 몸짓으로 종을 치시기 시작한다. 은은한 종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서 산사의 고요를 깨뜨린다. '쏴' 하는 일정한 빗소리와 '뎅'하는 간헐적 종소리가 한 데 어우러져 뭐라 형언할 수 없이 감정이 고양됨을 느낀다. 어쩐지, 송광사가 3보사찰 중 승보사찰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러다가 나조차도 선뜻 불교에 귀의할지도...그러나 불교에 귀의하기에는, 너무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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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멈출 생각을 않는 비에 굴복하고, 결국 송광사에서 내려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구례 화엄사로 출발했다. 그런데 잠깐 해를 보여줄까 고민하기도 했던 하늘은 완전히 마음을 굳혔는지, 작정하고 비를 내리 퍼붓는다. 이런 엄청난 폭우가 생전 처음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맹세코 이런 폭우 속에 차를 타고 이동해보기는 처음이다. 앞에 가는 차를 분간하기도 쉽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천둥번개까지 쉴 새 없이 소리 지른다.
결국, 아쉬움이 남기는 해도 집으로 곧장 돌아가기로 하고 차를 돌렸지만, 오히려 아쉬운 건 비 쪽인지 도무지 우리를 따라오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비가 마침내 물러가기 시작한 것은 울산에 다 도착할 때쯤이었고, 그렇게 내내 비와 함께 했던 우리 여행도 비가 그치고서야 끝나버리고 말았다.
* 후기: 꼭 다시 찾으리라 마음먹었던 보리암을 나는 두 번 더 다녀왔다. 지난 겨울의 초입에 한 번, 그리고 올해 초에 한 번. 이제 어쩔 수 없이 버스비를 더 내게 했던 차량통제는 없었는데, 어째선지 그토록 감동적이었던 보리암에서의 첫 경험 또한, 나는 다시 경험할 수 없었다. 여전히 보리암의 경치는 훌륭했지만, 처음의 감동이 너무나 뜻밖이었고 놀라웠었기 때문일까, 가슴이 벅차오르던 당시의 감흥은 웬일인지 재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생생한 보리암에서의 감동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고, 결국 나는 이 당혹스러움의 원인을 풀기위해서라도 또 다시 보리암을 찾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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