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6>
차 안에서 가볍게 아침을 해결하고, 처음으로 간 곳은 백천사였다. 특별히 알고 있었다거나 가보고 싶었던 곳은 아니지만, 가는 길에 들른다는 생각으로 찾았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이번 여행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백천사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본 것은, 어쩐지 음흉하게 웃는 듯 보이는 비대한 포대화상이었다. 실제로 포대화상이 불교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지만, 오직 겉모습만 놓고 볼 때, 이 포대화상은 백천사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포대화상 앞에는 투명한 불전함이 놓여있는데, 마치 '너희가 얼마를 넣을지 내 두고 보겠다.'는 심산인 듯해서 불쾌하기만 하다. 그러나 역시, 이 곳 백천사와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대웅전에 들어가니 '부처 안의 불당' 이라고 해서 부처님의 와신상 내에 불당이 꾸며져 있는데, 사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하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도인과 같은 분이 그 앞에서 참배객들을 상대로 생년월일을 물은 후, 몇 가지 운세(예컨대, 행운의 색이라거나 조심해야 할 달 같은, 삼척동자라도 손쉽게 말해 줄 수 있는 것들)를 가르쳐 주고, 대나무채 같은 것으로 몸을 탁탁 쳐준다(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일단의 명부를 작성하게 하고, 당연한 듯 돈을 받는다. 물론 주지는 않았지만 이 절, 뭔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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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밖을 나오니, 주변에 TV에 방영되었다는 '소원을 들어주는 돌' 현수막이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근처를 지키고 있던 보살 한 분이 다가와 그 돌의 효능을 친절히 설명해준다. 그 돌의 효능은 이렇다. 먼저 그냥 그 돌을 한 번 들어보고 난 후, 소원을 빌고 다시 돌을 들어본다. 그래서 소원을 들어줄 것 같으면, 다시 돌을 들었을 때 돌이 안 들린다는 것이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내 소원은 들어주지 않을 심산이신지, 처음이나 나중이나 힘껏 들자 두 번 다 돌이 들린다. 하지만, 이건 심리적인 효과를 배제할 수 없다. 일단 그 돌은 꽤나 무거운 편이어서, 아주 작심하고 들지 않는 한 쉽사리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이 돌을 통해 작은 위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절대로 돌을 들 수 없을 듯하다. 아니, 돌을 들지 않는다는 게 더 맞겠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 효과야 어떻든, 이렇게 부패한 절에서 무슨 신령한 효험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역시나 돌 한 번 들어보았다고 돈을 요구하는(그 전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친절한 안내인에게 끝내 돈을 주지 않은 것은, 결코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려는 신비한 돌에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다. 설령 내 소원을 100개쯤 들어준다 해도, 이 절에서 말하는 바를 믿고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러니까 꼭 집고 넘어갈 것은, 내 소원의 성취유무와 신비한 돌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백천사는 슬프도록 타락한 곳이다. 이곳은 할머니들을 가득 태운 관광버스가 종종 들르는 곳이라 하는데, 그 사이에 얽힌 은밀한 거래를 상상하게 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비약만은 아니다. 씁쓸한 마음으로 백천사를 나오는 길에 근처에 있던 백룡사를 부러 외면한 것은, 이웃은 서로 닮게 마련이라고 마음대로 추측한 까닭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다면 실로 무례한 생각이겠으나 어쩌랴, 그러게 이웃을 잘 만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점심을 먹고, 바다 위를 연결한 사천대교를 건너 금산 보리암으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3대 기도원으로 알려진 보리암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꽤 비싼 편인 주차요금을 지불하고 입장료까지 내야 하건만, 공사중인 관계로 차량통행이 통제된단다. 해서 차량은 오직 보리암과 아래쪽 주차장을 왕복하는 미니버스만 통행할 수 있는데, 이게 무료가 아니다. 게다가 어이없게도 왕복 모두 따로 돈을 내야해서, 그 차비만 개인당 2천원이 더 든다. 혹시나 백천사에서의 불쾌한 경험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슬 불안해진다.
그러나, 그 모든 걱정이 기우에 불과함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보리암으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경치는 진실로 황홀할 지경이었고, 그것은 보리암에 당도하는 순간 절정으로 치닫는다. 하늘과 바다, 산과 안개,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경치는 실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장관이다. 카메라를 들고 여기 저기 찍어보려 하지만, 그 어떤 사진도 내가 지금, 이곳에서, 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감동을 오롯이 전해주지는 못하리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런 곳에서 기도를 했다면, 어쩌면 웅녀가 굳이 마늘과 쑥을 먹지 않고서도 능히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도. 뭐, 그랬다면 물론 호랑이도 사람이 되었겠지만... 어쨌거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를 했던 것은, 명백하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록 살짝 살짝 내리는 보슬비와 흐린 날씨 덕분에 아주 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여름이라 보리암을 둘러보는 것이 조금 지친다. 특히나, 제법 걸어서 도착한 태조 이성계의 사당이 썰렁하기만 해서 힘이 쑥 빠진다. 하지만, 산신각을 오르는 것을 마다할 수는 없다. 한 발짝이라도 더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보리암을 둘러싼 경치가 한결 더 멀리 내다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의외로 보리암의 산신각은 그리 높지 않다. 계단을 수십 개 오르니 이내, 조금은 엉성한 산신각에 당도한다. 크게 차이는 나지 않지만, 그래도 보리암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이는 풍광의 감동을 가슴에 간직한다. 그리고 봄,가을,겨울의 보리암이 보여주는 또 다른 절경을 상상하며, 꼭 이 곳을 다시 찾으리라고 다짐한다.
보리암을 내려오니 저녁 6시 무렵이었고, 우리는 해가 조금이라도 있을 때 이동하는 것을 선택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들러 지역 관광 안내도 한 부를 얻었다. 그리고 거기에 나와 있는 숙소에 전화로 문의를 하니, 마침 내일 갈 예정인 선암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라 바로 예약을 했다. 어두워져서야 순천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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