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히 따져보면, 어제 칠레와의 A매치는 새삼스레 기대할 만한 경기는 아니었다. 몇 개월 간 공석으로 있던 감독자리에 허정무 감독이 취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그 과정이 꽤나 매끄럽지 못했고, 또한 아시안컵에서의 만족스럽지 못했던 경기력이 순간적으로 향상될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 팀인 칠레의 선수 구성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상암 경기장이 역대 A매치 최소관중을 기록했던 것은, 추운 날씨와 더불어 이런 냉정한 시각이 한 몫 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온정적으로 바라보자면, "내 축구 인생의 모든 것을 걸겠다."며 출사표를 던진 허정무호의 첫 시험 무대이자, 2008년의 첫 번째 A매치이고, 상대팀인 칠레는 비록 유럽에서 뛰는 주전들이 빠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미의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것도 분명하다. 게다가 5년여의 기다림 끝에 대표팀에 발탁된 김병지의 복귀와, 다시 기회를 부여받은 이관우의 출격도 흥미로운 요소였다. 추운 날씨와 핸드볼 경기에 대한 갑작스런 국민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상암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분명 이러한 점들에 몸속의 피가 뜨거워졌을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결과적으로 어제의 경기는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다. 0대1로 패한 것은 차라리 괜찮지만, 경기 내내 보여준 답답하고 지루한 공격 전개는 추위에 얼어붙은 팬들의 마음을 전혀 녹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관중석의 팬들에게서 경탄을 이끌어기 위해 노력한 것은 칠레 선수들이었다. 어느 칠레 선수의 현란한 크로스 오버(일명 헛다리 짚기) 기술과, 대담한 라보나 패스는 순간적으로 추위를 몰아내 줄 수 있을만한 묘기였다.

많은 한국 축구팬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은, 한국 선수들의 창의력과 개인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오직 '성적'만을 앞세우는 학원 축구의 근시안적 행태를 든다. 그것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팬들과 언론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실상 과도한 '기대치'와 '투지'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선수들에게 막중한 부담감을 안기는 것은 팬들과 언론이 합세한 바 크다.

얼마 전, 퍼거슨의 '영 보이'로 각광받던 기성용 선수가 올림픽 팀의 부진에 대한 비난에 "그럼 너희들이 대신 뛰던가~"라는 글을 미니홈피에 남겨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어린 선수의 신중하지 못했던 발언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감이지만, 그런 발언이 나온 배경은 더욱 유감스럽다. 조금만 잘하면 '천재'라고 띄워주고, 조금만 못하면 온갖 비난이 쏟아지는 상황은 어린 선수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그의 저서,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서 이렇게 단언한 바 있다. "축구의 역사는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이다." 그리고 히딩크는 "한국 축구는 실패를 두려워한다."고 말한 바 있다.

축구는 태생적으로 '실패를 전제한 게임'이다. 만일 그렇지않다면, 축구는 0대0의 스코어가 결코 나와서는 안된다. 나는 어린 선수들이 가능한 한 오래, 축구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실패'에 대한 '의무감'과 '비난'에 걱정하기 보다는, '성공'에 대한 '즐거움'과 '격려'에 기뻐했으면 한다. 본인이 즐겁지 않은 축구는 절대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머지않은 미래에, 관중이 가득 들어찬 경기장에서 한국선수들이 화려한 개인기와 창의적인 플레이로 팬들의 열정을 극한으로 끌어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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