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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ㅣ 네버랜드 클래식 36
마크 트웨인 지음, 김경미 옮김, 도널드 매케이 그림 / 시공주니어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나이가 들고 보니 그 가치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내게는 그런 책이다.
어린 시절에 허클베리 핀을 읽었을 때는 골초에 게으르고 온갖 미신 외에는 매우 무식한데다가 지저분하기까지 한 허클베리 핀을 보고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는 말이 절로 나왔고 '불쌍한 허클베리 핀'을 도와주기는 커녕 아동학대를 일삼는 허클베리 핀의 아빠를 포함하여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어른들만 나와서 짜증났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스타일 '명작 동화' 시리즈 '허클베리 핀' 애니메이션은 허클베리 핀이 워낙 착하게 나와서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명작 동화' 시리즈의 그림체를 싫어해서 끝까지 볼 수 없었다. (가장 싫었던 것은 '빨간머리 앤'이었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내가 주목한 존재는 주인공이자 이 책의 이야기꾼인 허클베리이다. 지금 다시 보니 허클베리 핀은 미야자키 하야오 스타일의 동글동글하고 착한 어린애가 아니다. 차라리 고행석 화백이 허클베리 핀을 그렸으면 더 어울렸을 것이다. 톰 소여가 유치하고 꿈많은 소년이라면 허클베리 핀은 단맛 쓴맛 다 아는 어른이고 철학자이다. 게다가 허클베리는 요즘 말로 cool하다. 자기 주변 사람들이 존경하고, 맹신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허클베리는 우선 살펴보고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서 헤아려 본 다음에 받아들일 것인지 아닐 것인지 판단한다. 허클베리의 사유 체계는 물론 무척 단순하고 무식하지만 그래도 허클베리는 주변 사람들보다는 합리적이고 판단력이 있다.
허클베리는 자신의 판단력을 바탕으로 도망 노예와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가며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이룰 가능성이 매우 낮은 목표를 향해 온갖 모험을 하며 이야기를 만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호메로스의 오딧세이를 연상케 한다.
게다가 허클베리는 요즘 말로 말하면 '대인배'다. 더글러스 과부댁이나 윌슨 아주머니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짐의 엄살도 받아주고, 사기꾼들도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잘 상대해준다. 허클베리의 너그러움은 톰 소여가 짐을 탈출시키기 위해 벌이는 일을 돕는 장면에서 아주 꽃을 피운다. 그냥 짐을 밤에 몰래 풀어주면 그만이지만 허클베리는 중세 기사담에 취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돈키호테랑 다를 바 없는 톰 소여 기획, 각본, 감독의 스펙타클대하탈출극을 받아주느라 며칠 동안 생고생을 한다.(물론 가장 고생한 사람은 짐이다.)
인생은 씁쓸했지만 글만은 정말 재미있게 썼던 마크 트웨인답게 중간중간 재미있는 표현도 눈에 띈다. 허클베리 핀의 아버지를 묘사하는 장면이나 허클베리 핀이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논평하는 장면에서 쓰인 표현들은 참 재미있다. 읽으면서 피식피식 많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