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바나나, 보노보 - 언어학의 문제와 퍼즐 그리고 논쟁
닐 스미스 지음, 강용순 옮김 / 한국문화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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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문가 집단의 유머를 좋아한다. 전문가 집단 유머의 특징은 '아는 만큼 웃긴다'는 것이다. 특히 해당 전문 용어를 알아야 하거나 시스템에 대해 알고 있는 내부자가 아니면 웃을 수 없는 유머는 내가 웃지 못하더라도 흥미를 느낀다. '그들만의 유머'를 이해하는 것은 '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국의 언어학자 닐 스미스가 쓴 언어학이라는 전문 분야에 대한 유머집이다. 저자는 읽는 사람 재미있으라고 이 책을 썼다. 이 책 서문의 맨 첫 줄을 여기 옮긴다. "나는 지난 40년의 대부분을 언어학을 하면서 보냈다.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제 그 기쁨을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그런 의도로 쓰여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을 읽고 아무나 웃기는 힘들 것 같다. 언어학, 특히 영국이나 미국에서 생성이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고 소리내서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웃어야 할 지 웃는 대목을 몰라서 당황할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몰라서 못 웃는 사람을 위해서 책의 뒷부분에 언어학 전문 용어에 대한 용어해설집을 실어 놓았다. 그렇지만 전문용어 해설집을 읽다보면 웃음이 싹 가실 수도 있겠다. 

 

그래도 '공범주 원리'니 '프로탈락 언어'니 하는 말을 모르더라도 이 책에는 호기심이 가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뭐가 뭔지 몰라서 웃지는 않더라도 신기한 사실을 아는 맛으로 이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 제시한 흥밋거리들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언어와 바나나와 보노보가 나온다.

 

저자 닐 스미스는 뇌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뇌신경이 손상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올리버 색스처럼 인간의 언어 능력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20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지만 일상 생활은 불가능한 언어 서번트 크리스토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시각과 청각에 모두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뇌가 고장나지 않았다면 선천적인 언어 능력으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태도우마(타도마법, 촉화법,Tadoma method)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한다. 크리스토퍼 이야기는 언어학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 급의 호기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소재이다. (2007년 1월에 닐 스미스가 한국에 왔을 때도 크리스토퍼에 대한 발표를 한 바 있다.)

 

이 책을 웃으면서 읽은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매력은  글 한 편 한 편에서 웃음과 동시에 찾아오는 알싸한 느낌에 있었다.  특히 '이론언어학자'와 '응용언어학자'가 자신들의 방법론만이 옳다고 싸우는 이야기나 '촘스키'라는 기표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에 관한 글을 읽으며 광대뼈의 주근깨가 확 달아올라서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연구자나 비연구자가 '당연히 그 의미이겠지' 하며 쓰는 언어학의 전문 용어들이 사실 그 의미가 아닐 수도 있으며, 어떤 전문 용어들은 '상투어'나 '관용표현', '당연한 존재'가 되어 오히려 학문의 목을 죄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과연 아는 것인가?"  과연 '언어보편적'이라는 말은 어떤 맥락에서 써야 적절한가, 범언어적 현상이란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일까? '인간의 생득적 언어 능력'이란 어떤 상황에서 써야 하나? '제2언어'란 무슨 뜻일까? '조기언어교육'에서 '조기'는 과연 언제인가? "네가 알고 있는 언어학 전문 용어들의 정의를 다시 확인해 봐. 특히 생성이론과 관련해서." 저자의 질문 어조는 유머러스하지만 따끔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낱개 포장된 호올스 사탕을 생각했다.  이 책은 짤막한 글들을 모아서 만든 책이기에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어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어도 호올스 사탕처럼 귀와 코와 목구멍이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촘스키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며 기대하지 못한 기쁨을 발견할 거라고 했는데 나는 이에 동감한다. 그리고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어로 읽게 해 주신 번역자(강용순, 강혜경)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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