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고전'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것이나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전부를 좋아한다. 사극을 볼때면 등장인물이 몸에 걸치고 있는 옷과 장신구는 물론 사용하는 물건이나 방 안의 가구들, 건물의 생김새며 그네들의 말투까지도 좋아서 푹 빠져든다. 언젠가의 여름방학때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구운몽 한권만을 읽고 또 읽기도 했다. 이런 취향은 당연히 역사도 좋아하게 만들었는데 우습게도 근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관심도가 뚝 떨어지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아니 왜 그리도 정신을 못차리게 좋아하는걸까. 우리 고전문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지금까지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이제서야 고민해보면 옷이나 음식, 건물과 말투 등 서로 다른 유형의 것들을 모두 묶어 하나로 보고 여기서 느껴지는 느낌에서 안심을 했던게 아닐까 한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우러르며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끊임없이 빌었다. 아프지 않고 건강히 오래살기를,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일 없이 몸 편히 살기를, 웃을일이 많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런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무리 억울하고 힘들어도 착하게 살아야 한다, 선을 선택해도 된다고 말했다. 결국은 다 되돌아오니까 딴생각 말고 옳은것을 택하라고 한다. 이야기 속에서 착한 주인공들은 시련에 흔들리지 않은 보상을 받았다. 이런 결론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때 받은 기분이 한복의 빛깔에서, 건물이나 도자기등에 새겨진 문양에서 느껴진다.

 

  고전을 대하는 내 마음은 한정된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모셔둔 상태로 지속되는 애정(愛情)이다. 그래서 <전을 범하다>라는 제목은 내게 도발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책에서 보인 머리말은 더욱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박제된 고전을 위한 하이킥>. 박제됐다는 수식어에 찔끔하고 하이킥에 켁켁거린다. 지금껏 '권선징악' 이라는 통합된 주제 하나로 자리잡아온 고전소설의 틀을 깨버리고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고전소설이 우리 삶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예술작품'으로 있으려면 이렇게 구닥다리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는 '옛날'소설이 어찌 '고전'소설이냐고 꼬집는 글에 입은 꼭 다물어진다. 반박할수가 없다. 아니 동의하지 않을수가 없다.

 

  목차를 보니 유명한 고전소설이 늘어서있었다. 네가지 소주제를 정해 세네가지 작품을 묶어놓았지만 하나의 소설작품처럼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는 아니었기 때문에 순서에 상관없이 제멋대로 읽었다.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춘향전이었다. 목숨의 위협과 주변사람의 모든 조롱으로 자신의 사랑이 무시당하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접지 않은 춘향이에 대해 암행어사라는 권력자로서 다가오는 몽룡의 태도는 의심스럽고 비난받을만하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목숨까지 바친 효녀 심청의 이야기는 심봉사를 비롯한 등장인물들 간의 계약관계와 부처라는 신과의 무거운 약속으로 인해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심청이 살해사건이 되었다. 책을 통해 처음 알았던 지귀설화는 어땠던가. 선덕여왕을 사모한 지귀라는 사람이 여왕으로부터 만날 약속을 전해받고 기다렸지만 깜빡 잠이들어 만나지 못해 상심한 마음이 커 불귀신이 되었고 여왕은 술사에게 명하여 주문을 만들어 화재를 진압했다는 이야기다. 언뜻보면 지귀라는 사람의 신분차이를 뛰어넘지 못한 안타까운 짝사랑이지만 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은 꿈도 꾸지 말라는 서늘한 경고라고 한다.

 

  솔직히 마음이 불편할때가 많았다. 특히 심청전 부분을 읽을때는 심봉사는 물론 심청이를 젖먹여 키웠던 동네사람들 모두가 심청이 살해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해석이 언짢았는지 심봉사가 눈을 뜰지 의심하면서도 부처와의 계약을 인간이 깰 수 없다며 다가올 죽음과 혼자남을 아버지 생각으로 슬퍼하던 심청이가 불쌍했는지 모르겠지만 눈언저리가 뜨끈뜨끈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해석을 동의하게 만드는 지은이의 풍부한 지식과 하나의 작품에 존재하는 많은 이본이 보이는 차이점이 좀 더 살아있는 고전소설을 보고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내가 알고있던 전우치전이 반쪽자리였다는 느낌은 참 씁쓸했다.

 

  권선징악이라는 틀 안에서 안일한 편안함을 느끼고 아꼈던 고전소설은 그 속을 들여다보니 시대를 뛰어넘어 이자리에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덧대어 또다른 이본을 탄생시켰다는것을 생각하면 변하는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최근 볼때마다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일일연속극이 고전소설의 현대판 효녀이야기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책을 읽으며 불편했던 내모습이 웃기게 느껴졌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지만 그만큼 말랑말랑하게 변신을 거듭해 지금도 함께 하길 원하는 바람도 있었다는걸 겨우 알았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는 우리 고전에 대한 애정(哀情)도 그림자처럼 존재했던 모양이다. 

 

  지은이가 보낸 하이킥은 아팠다. 하지만 맞고나니 오히려 시원해졌다. 언어폭력처럼 느껴질만큼 따끔했던 비판이 한계를 깨버리고 유연하게 고전소설을 대할 수 있는 눈을 주었다. 내 눈으로 다시 읽기 위해서 나만의 가치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텍스트나 소리등으로 모양을 달리한 고전소설들을 되도록 많이 보고 들어야겠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내 손으로 써내려간 또 한권의 이본을 꿈꾸는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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