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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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쌀쌀해지는 늦가을에 낙엽보다 무겁고, 추위보다 매서운 통보가, 찾아오는 계절이 있다. 바로 전기,가스 요금 명세서와 월세금 납부일. 신용카드 지금이 날아드는 월말이다. 가난한 자취생에게, 겨울은 가을이 끝나고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통장에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찾아온다. 통장에 치미는 마이너스의 계절. 영하보다 무섭고 동장군보다 강하다. 옷을 단단히 매여입어도, 낡은 내복을 꺼내 입어도 가시지 않는 가난의 추위 앞에서, 우리가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은,  멀리 있는 봄날을 기다리거나,  지금이 아닌 다른 날들. 더 따스하고 가슴 벅찰 겨울을 꿈꿔보는 일이다. 아직 내가 이 가난한 자취생의 젊음을 사랑하는 까닭은, 내가 꿈꾸는 날들이, 오늘이 될 수 없는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내일이 될 수 있는 미래의 앞날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런 앞날을 그릴 수 있다면, 그런 앞날의 그림자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 그림은 햇살이 스며드는 크레타 섬의 해변일 것, 그 그림자의 주인공은 그 곳에서 기둥처럼 서서 바다를 응시하는, 조르바 일 것이다.


 

-  



 

자취방의 창문 사이로 가만히 찬 바람이 스며드는 때, 바람에 베일까봐 창문을 꽉 닫다가도 어느 순간 , 그림처럼 서서 바다를 응시하는 조르바, 외투를 벗어 던지고, 겨울바다를 헤엄치는 그를 떠올린다. 그러면 갑자기, 매서운 겨울바람에 뛰어들어. 무참히 베이는 한이 있더라도, 창문 밖 세상으로 헤엄쳐 나가고 싶어진다. 조르바를 닮아간다는 것은, 두려움도 없이, 외로움도 없이, 무한한 자유만이 바다처럼 펼쳐진 여행의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 희망으로 벅차오르는 순간이. 이 소설 안에, 조르바의 가슴 안에, 있다.  



“젊은 선생, 당신은 이유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사람이오? 무슨 일이건 그냥 하고 싶 

 어서 하면 안 되는 거요? 대체 무슨 생각이 그리 많소?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 눈 질끈 감 

 고 해버리는 거요. 당신이 갖고 있는 책은 몽땅 쌓아놓고 불이나 질러버리쇼. 그러면 누 

 가 알겠소? 당신이 바보를 면하게 될지. ” 
 


그러나 크레타 섬 해변에 서있는 조르바의 영상이 내 눈가를 모두 스치고 나면, 다시 하얀 종이 위에 잉크빛 활자들이 되살아나고, 일상에 치여 좌초된 내 지난 꿈들의 기록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매서운 실패에 치이고, 무거운 현실에 얽매여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젊음의 한가운데로, 무거운 발걸음을 옪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렇게 움츠려든 겨울이 내 방 안으로 들어와, 함께 살자고 날 어르고 달랠 때마다, 조르바를 향한 나의 꿈은, 영원히 가지 못할 여행을 계획하는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고, 먼 북녘의 고향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노인처럼 그 꿈으로부터 뒤돌아서게 만든다. 더 많이 소유할 것을. 더 넓게 누려볼 것을. 더 높은 곳에 올라볼 것을 주문하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자신의 가슴에만 반응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울 일이다. 타인이 던져준 이유와 현실이 가져다준 변명이 아닌, 뛰고 있는 붉은 가슴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산다는 것은, 매일밤 전기세와 가스비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끓인 물로 머리를 감는 청년에게는 요원한 일인 것이다. 
 

 

내가 인생과 맺은 계약에 시한 조건이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 길에서 브레이크를 풀어 봅니다. 인생이란, 가파른 경사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법이지요. 잘난 놈들은 모두 자기 브레이크를 씁니다.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중략) 밤이고 낮이고 나는 전속력으로 내달으며 신명 꼴리는 대로 합니다. 부딪쳐 작살이 난다면 그뿐이죠. 그래 봐야 손해 갈 게 있을까요? 없어요. 천천히 가면 거기 안 가나요? 물론 가죠. 기왕 갈 바에는 화끈하게 가자 이겁니다.
 

 

그러나 조르바는, 자신의 꿈을 향한 길 위에서조차, 앞으로 나아가는 엑셀이 아니라, 주춤하며 멈춰서는 브레이크만을 걸고 있는 나에게 계속된 제안을 건넸다. 질서도, 법칙도 없는 춤사위로, 나이와 신분을 넘은 사랑으로. 도덕과 종교를 가르는 신념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조르바의 삶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젊은이는 없을 것이다. 예순을 넘은 노인에게서 청춘의 방법을 배운다는 것. 주저하고 망설이는 젊은이에게, 브레이크를 버린 조르바가 어서 “가자”라고 말할 때, 나는 가슴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삶의 열정,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도전이라는 낱말이 가진, 원래의 열기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나를 지배하는 현실의 규율에 맞선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몸이 부서지도록 부딪치는 것임을. 온 몸이 땀에 젖도록 현실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는 것임을. 조르바는 자신의 삶으로써 증명해 보인다.  

그래요. 당신은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그런 증명 앞 에서  나는 자유라는 낱말의 의미를 머리로만 생각해왔음을 깨닫는다. 자유는 책에 쓰여 있지 않다. 자유는 시험지의 정답이 아니다. 자유는 합격과 불합격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조르바의 자유는, 훌쩍 모든 답을 버리고 새로운 답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라기보다, 내 자신이 그 “모든 것”으로 되는 것이다. 추운 겨울이 찾아올 때, 따뜻한 방안의 이불 속으로 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뜨거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써, 자유의 의미를 정의해나가는 것이. 진짜 자유임을 조르바를 통해 깨달았다. 언제나 시간으로만 청춘을 살던 나. 세월이 준 청춘을 “얻어” 쓰던 내가, 내 자신으로 청춘을 만들어나가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나는 더 이상 어두운 겨울날, 차가운 자취방이 아닌, 크레타 섬 해변 위에 조르바 와 함께 서 있었고 , 나는 그 어떤 순간보다 자유로웠다. 


- 
 


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는 다시 추운 겨울날의 자취방으로 돌아온다. 방안의 먼지들은 여전히 책장 사이의 책 사이로 스며들고, 전기세와 가스비 통지서는 책상 위를 나뒹구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현실이 가진 막막함은 여전히 자신의 무게를 늘려가며 나를 구속할 준비를 한다. 수색영장도 없이 찾아오는 겨울의 추위 앞에서, 오랫동안 나는 내 뜨거운 가슴을 증명할 증거물 하나 없는 피고인, 매일 내 청춘의 명예를 훼손했던 용의자 였다. 그러나 지금,나는 조르바를 통해, 스스로를 재판하는 심판관, 나 스스로를 벌하는 검사, 나 자신을 옹호하는 변호인이 되고자 한다. 나의 자유는 내가 아닌 누군가로  판단되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나의 모든 것이므로. 오직 나를 심판할 수 있는 죄명은 “자유” 내가 치를 죄값도 "자유"  내가 수감될 감옥도. “자유”가 된 다. 내 자유는 나로 인해 만들어지고, 나로 인해 사라지고, 나로 인해 다시 살아난다. 이 모든 자유를 조르바를 통해 얻었다. 조르바는 내 자유의 다른 이름이자, 내 청춘의 새로운 자세다.

 

    

" 나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 - p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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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과거 - media, memory, history - 과거는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기억되고 역사화되는가?
테사 모리스 스즈키 지음, 김경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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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과거와 현재와의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지나간 일들은, 네 마음에 인상을 남긴다. 그 일들은 과거로 지나갔어도 그것들이 남긴 인상은 현재에 남아있다. 나는 바로 현재에 남아있는 그 인상을 재는 것이지 과거로 지나가면서 인상을 남긴 그 일들을 재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시간을 잰다고 할 때 나는 바로 그 남아있는 현재의 인상을 재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견해에는 결국 우리들의 시간적 지평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뿐이라는 관점이 담겨있다. 즉 과거라고 하는 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사건 자체가, 아니라, 우리들이 기억하는 방식에 맞춰져서 남겨진 인상과 같은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즉, 과거는 그것이 현재에 분명한 인상으로 남을 때 의미가 있다. 

  여기서 그 “인상”이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지식”이나 “기억”만을 의미하지 않는듯하다. 즉, 인상은 우리들이 기억하는 방식의 표면상에서 사고의 망에 걸러서 남은 기억들인 동시에 그것을 경험한 순간 느낀 감각적인 것들과 함께 남는다. 즉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예전의 일들은 감각적인 체험으로 인해 구체화될 때 더욱 더  선명한 자국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기억들이 과거고 그 과거의 집합이 역사라고 할 때, 역사는 우리들에게 선명히 “인상”으로 남아 구성된 지난 “현재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에 대한 독특한 관점은 “우리안의과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찰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제 1 장 “과거는 죽지 않았다”에서 “동일화로서의 역사”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그 동일화로서의 역사는 “상상력과 공감”에 의해서 재구성되어지고 우리들은 미디어를 통해 과거의 현실과 사람들과 교류하며 공감과 상상력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감각과 시각적 체험을 통해 역사가 재구성되어지고, 그 동감과 상상력이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또 하나의 분명한 인상, 과거로써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적 관점과 분명히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과 저자의 견해를 종합해보자면 결국 “선명한 인상의 자국을 남기는 기억들이, 동일화로서의 역사이며, 그 인상은 상상력과 공감, 감각적인 체험을 통해서 가장 강하게 남는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미디어 속의 수많은 매체들 속에서 구성되어지고 제시되는 역사의 단편들이, 그 무엇보다 우리에게 선명한 인상과 기억을 남기기 때문에, 미디어 매체들 속에서 구성되어지고 있는 과거, 그 미디어들의 특성을 분석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즉 미디어가 남긴 특정 과거에 대한 인상이, 우리들의 그 과거에 대한 인상이 된다고 할 때, 그것은 과연 참인 과거 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역사”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점에서 저자의 매체비평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매체 속에 담긴 과거를 탐구하고 있는 과정에서,  미디어로써 구성된 역사 ,그것을 역사의 진실로 기억하고 수용하는 사람들의 모습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즉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오직 학문적 영역에서 논의한 -해석으로서의 역사- 역사라는 엄정한 개념만을 강조하여 , 대중매체 속 역사를 평가절하 하기보다는, 그렇게 구성된 역사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 라는 되물음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의문을 쫓는 과정에서, 매체들이 담고 있는 역사는 근본적으로 매체의 한계에 의해 왜곡되거나, 조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즉, 특정한 매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역사를 서술하고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의 한계를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과거의 사실을 다룰 것인지,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다룰지, 이 모든 선택과 배제의 결정은 매체,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의해 좌지우지됨을 수많은 사례 분석을 통해 저자는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영화라는 매체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내적 한계와 영화산업이 가진 문화 경제적 측면을 반영해야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즉 영화는 특정한 과거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변형시킬 수 밖 에 없다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결국 미디어 속의 과거는 일정부분 조각되어지고 틀지어진 과거가 되며, 그것이 실제로 그러했다! 라고 결론 내려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로 인해 영화를 통해 우리가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구성하고 이해했을 때, 그것은 영화의 현실과 일체성으로 그 이야기들은 선명히 기억에 남게 되지만, 그 과거는 역사의 전체적 맥락과 온전한 내용을 갖추지 않은 구성된 역사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과거가 그 매체의 특성과 기준에 의해 조각되어진 과거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미디어, 매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인상도 그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의해 이해되고, 이것을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방식에 따라 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선명한 인상으로써 남는 것은 우리들의 지난 경험과 취향, 지식과 문화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경험한 현재들을 편집해서 기억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회고하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어린 시절이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 아니라, 우리들이 인상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들이 “아름다움”뿐이기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매체의 특성과 한계에 의해 구성되어진 역사가, 그것이 엄정한 의미에서 역사가 되지 못하여, 특성에 의해 구성된 과거라 할 때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매체, 미디어 자체도 사람에 의해 구성되고, 사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써지기 때문이다. 매체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미디어에 의해 구성되고 조각되어지는 것처럼 사람도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 자신만의 느낌과 감상에 맞게 편집하고 표현하여 전달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미디어의 특성으로 인한 한계로 인해 과거와 역사가 오해되고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서술의 한계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당연함을 인정하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역사에 대한 또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즉, 역사라고 하는 것이 주관적으로 구성되고 만들어졌으며, 그러므로 그 어떠한 역사나 과거도 “진짜”가 될 수 없다는 냉소주의적인 현대의 시점에 있어서 “역사에 대한 진지함”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진지함이란,  결국 우리가 매체를 통해 기억하고 받아들이는 과거는 매체에 의해 수정되고 쪼개어진 과거이며, 동시에 그것자체로 “동일화된 역사”를 하나의 역사적 측면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그 인정에 그쳐선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매체속의 과거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그 과거와 역사라고 하는 것들은 교과서나 강의실 안에서만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미디어들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고, 동시에 그렇게 전달되는 과거와 역사의 호소력이 ‘우리안의 과거’를 구성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럴수록 더욱 더 우리 주변의 과거, 우리 안의 과거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과거, 역사를 수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만의 인상과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디어 속에서 역사를 구성하는 사람과 그 과거 속에 살고 있는 인물과 열린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것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아주 큰 현재의 변화도 일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 결국 우리 자신에 담기는 과거들은 우리들만의 감각과 기준으로써 기억되고 만들어지지만, 그 과거는 단순히 과거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로 환원되는 방식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즉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가에 따라, 지금 현재의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 언젠가 과거 속으로 들어가 사진 같은 인상으로 남는 것들이 결국은 우리가 앞으로 맺게 될 관계의 방식과 앞으로 있을 현재를 기억하는 방식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저서는 대중매체가 은연중으로 우리에게 학습시키고 있는 과거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연중의 학습을 통한 또 다른 학습을 하게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즉, 독서와 성찰의 방식은 우리들이 손쉽게 대중매체의 이해와 전달을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만듦으로써, 끊임없이 우리안의 과거를 부시고 다시 만들어나가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이 맞다면 결국, 이러한 날카로운 이해의 칼날에 의해 재단되고 만들어진 과거야말로 올바른 “역사”, 올바른“과거”가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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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ushutong8141 2008-10-2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은 좋은 책이다.
 
뻔fun한 드라마 찡한 러브 - 드라마 속 멜로 즐기기
신주진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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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람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비추는 반영물에 의해서 자신을 보며, 그 반영물에 의해서만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들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아무도 자기 자신의 실제를 확인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의 자의식은 무언가에 비추어진 자기 자신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의 실재를 믿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추어지는,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때 살며,  자기 자신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할 때 죽는다. 즉, 거울을 믿지 않으면 사람은 미치거나 죽게 된다. 결국 인간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양새를 다듬고, 그 모습에서 자신의 이상화된 모습을 찾는다. 마치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머리를 만지고, 옷의 매듬새를 고치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현대인들은 대부분 세 가지의 거울 속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듯하다. 그 거울이란, 쇼 윈도우, 모니터, 브라운관 이다. 이 세 가지 거울은 삼각형의 방처럼 현대인들의 의식을 갇어 두고 있는 삼각지대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는 마네킹,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이상화된 자신으로써의 아바타, 그리고 현실에는 존재할 수없는 완벽한 캐릭터. 이 세 가지의 모습을 각각의 거울 속에 반영하고, 그런 그들이 되고자, 사람들은 애쓴다. 그들은, 현재의 자기 자신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거울 안에서 행복을 찾고 그런 거울 안에서의 보물찾기는 언제나 우리를 언제나 배고프게 만들고, 불만족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이 세 가지의 거울에서 우리는 자신을 찾고 있는 동시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의 거울 중에서 브라운관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비추어내고 있을까? 우리는, 그 거울 앞에서 어떤 모습이기를 기대할까?  브라운관은 20세기가 만들어낸 가장 화려한 거울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브라운관 안에 담긴 사람들에게 열광하며,  자신이 브라운관에 나온다면 정말 좋겠다고 노래를 부른다. 브라운관이라는 화려한 거울의 변신 앞에서 자신의 구질구질한 현실 또한 “변신”되기를 바라며, 티비에 나온다는 것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사람 한명 한명의 페르소나를 담아내야만 하는 브라운관이라는 거울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동시에, 욕망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무엇일까?


     신주진의 “뻔한 드라마 찡한 러브”는 결국 브라운관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욕망의 정체를  “사랑”이라고 말한다. 드라마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기대하게 만들고, 동시에 사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만든다. 작가는 드라마 속의 사랑의 통속성과 진부함이 지긋지긋함에도 불구하고, 그 진부함과 통속성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욕망에 대해 쓰고 있는 동시에, 자기사진 또한 그런 욕망에 기대어 글을 쓴다. 그 욕망은 “사랑”이라는 애매모호한 문구 앞에서 강력하다. 그 강력함은 우리가 가진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티비가 우리에게 준 사랑의 강력함이다.


    브라운관에 나오는 드라마가, 우리의 욕망하는 대상으로써 존재하는 하나의 거울이라면, 드라마는 우리가 그려낸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자화상은 객관적인 자신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실주의”라기 보다는,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담아낸 “인상주의”로 보인다. 즉, 객관적인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여 그려내는 정직한 화풍이 아닌, 자신의 개성과 색깔을 명확하게 그려내는 - 그만큼 이상화된 풍경을 그려내어 담는 비현실의 풍경이 바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이 무엇으로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고,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지를 묻는 일은 결국 우리가 무엇이 자신에게 오기를 바라며, 동시에 무엇을 호소하고 싶은지를 묻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멜로드라마는 그 무엇을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브라운의 거울 앞에서 우리는, 한 남자 혹은 한 여자를 만나며, 그 어떤 장애를 뛰어넘는 사랑을 통해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비상구를 마련한다. 가정주부는 아침드라마에서 불륜을 꿈꾸며, 아가씨들은 미니시리즈에서 공주님을 꿈꾼다. 그러나 이 사랑은 정직하고 사실적인 사랑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그려져 있는 사랑, 누군가에 의해서 매개화된 사랑이다. 드라마에 현실의 구질구질한 두 남녀의 발버둥은 없고, 오직 구구 절실한 두 남녀의 영원한 사랑만이 있다.


    그 호소는 분명 작가의 말처럼,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자화상이 담겨있을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사랑에 대한 자화상을 브라운관에 그려 넣는 것이다. 마치 8살의 소녀가, 거울위에, 어머니의 립스틱으로 자신의 왕관을 그려 넣는 것처럼.


     그러나 중요한 지점은 드라마라는 자화상은 우리의 손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손에 의해 그려진다는 점이다. 즉,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들의 모습을 돈을 받고 그려내는 놀이공원의 길거리 화가들과 같다. 이 길거리 화가들은 사람들을 그릴 때, 현실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최대한 그리는 대상의 특징을 담되, 그것들을 이상화해야 한다. - 길거리화가들이 예시로 걸어놓은 그림의 대부분은 TV 속에 나오는 유명인들이다. 그것들을 보고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은, 그들과 같은 위치의 TV 속에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 그렇게 그려져야만 사람들은 완성된 작품을 건넸을 때, 기뻐한다. 자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보았을 때 느끼는 행복. 이러한 거짓말을 그 길거리 화가들은 “팔고” 있는 것이다. 결국 드라마 또한 우리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기대하는 욕망을 팔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비루한 현실은 절대 드라마 속에 담기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의 비현실에서만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드라마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꿈꾸게 만든다. 더 나아가 단순히 사랑을 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사랑을 “따라하게 만든다. 요즘의 드라마 속에 담긴 “신분과 계급간의 사랑, 복잡한 관계 속에 얽힌 사랑,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지속되는 사랑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우리들이 그러한 것들을 꿈꾸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꿈꾸게 만들어왔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타이타닉의 명장면을 그대로 연인이 되어 복습하고, 드라마 속에 나온 유명한 카페에서 한잔의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드라마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랑을 우리가 그대로 믿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거울을 보며 ,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을 닮아가듯, 우리는 드라마라는 브라운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을 드라마속의 감동적인 순간에서 배우고, 그들의 연기를 현실의 실재에서 다시 반복한다. 그럴 때 우리들의 사랑은 브라운관 속에 갇힌다. 

   물론 드라마가 우리를 그렇게 일 방향적으로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가 말하듯,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신분의 위상에 따라, 드라마의 양태들은 변화해왔고, 그 드라마 속 인물들은, 우리의 세상살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일정부분 닮아있다. 즉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며, 그곳에는 오직 판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드라마들의 판타지는, 브라운관을 지배하는 광고의 판타지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광고는 우리가 배고플 때는 "이것“을 먹어야 한다고, 아름답고 싶을 때는 이것을 입어야한다고 말하며, 우리들의 욕망을 자신들의 욕망과 상호 교환한다. 우리들의 드라마가 위험한 이유는 , 그 드라마속의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욕망하는 것, 즉 계급상승의 욕구, 신분을 초월한 사랑, 얽히고 얽힌 복잡한 관계의 ”쿨“한 사랑 같은 것들을, 우리가 아무런 여과 없이 사먹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요구에 손쉽게 순응할 때, 우리는 사랑이라는 질문 앞에서, 항상 남의 답만 베껴 쓰는 컨닝 만을 반복할 것이다. 아무리 그러한 사랑을 ”찡하다고“ 표현해도, 그 진부함과 통속성에, 우리들이 각자 어떤 사랑을 해나갈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진지한 고민의 모색은 담기지 않는다면 그 찡함은, 마음속의 울림의 찡함이 아니라, 구멍가게에서 사먹는 아이샤의 ”찡함“과 다르지 않다. 광고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물건을 살지 고민하게 만들지 않게 만들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위험하듯이, 멜로드라마가 담은 ”특정한 사랑“을 고민 없이 사먹을때, 우리들의 사랑은 위험하다.

   소설가 김연수는 사랑을 “어른들의 학교”라고 설명한다. 즉, 사랑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알아나가며, 삶을 배워나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브라운관의 드라마와, 소설속의 드라마가 다른 점은, 소설속의 사랑은 우리들의 사랑을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소설은 어떠한 화려함으로도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며, 화려한 눈속임으로 우리를 넘어가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직하다. 그러나 브라운관의 거울 속에 담긴 드라마의 사랑들은 정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짧은 채널의 Zapping에서 살아남는 생존게임에서, 정직함은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드는 시간에 채널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브라운관이 꺼진 후 그 브라운관의 검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사실은 브라운관이라는 거울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사람들은 그 검은 화면위에, 자신의 모습이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동시에, 현재의 자신을 되짚어보는 과정의 피로를 느끼려하지 않는다. 즉, 브라운관의 거울은 마치 우리의 욕망과 사랑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와 가장 멀리 있다는 점에서 , 우리를 우리로부터 떼어내게 만든다. 그 거리는, 우리가 꿈꾸는 것과, 현실의 것이 가진 괴리의 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괴리를 좁혀나가는 노력과 성찰이다. 드라마를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성찰해나갈 때 , 브라운관의 사랑은 어른들의 학교가 될 수 있다.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브라운관이 욕망하는 사랑을 돈을 주고 사듯이 , “간단히” 입력한다면, 채널을 바꾸듯 간단히 “바꿔버린다면” 우리는 사랑을 통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오직 한순간의 달콤한 꿈으로, 텍스트가 설명하는 그 뻔뻔(FUNFUN)한 드라마의 즐거움으로만 드라마는 그칠 것이다 .그럴 때 기형도의 시, “빈집”의 탄식은 이렇게 쓰일 수 있다. 
  

  “불쌍한 내 사랑, 브라운관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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