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한 경제학자는 기업에도 국가가 있다고 말한다. 다국적/초국적기업 시대에도 기업의 '출신'은 분명 특정 국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예컨대 시장주의자) 그를 '국가주의자'라고 부른다. 물론 그 뉘앙스는 비판적이다. 세계화 시대의 경제가 국가의 경계에 갇혀서 되겠느냐는 말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꾸준히 개혁 세력을 비판해온 장하준은 올해 초정승일, 이종태(이하 장하준 그룹)와「무엇을 선택할 것인가(2012)」를 출간했다. 그들은 한국경제의 주주자본주의적 재편에 반대하는 근거로 그것이 국내자본을 외국자본에 인수될 위험에 쉽게 노출시킨다는 점을 든다. 시장주의자들은 이 반시장주의자들을 몰아붙인다. 기업의 운명을 시장의 경쟁메커니즘에 맡기지 않는 것은 '가격이 결정되는 방식'을 배운 경제학자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비효율적 기업이 포함된 산업부문을 구조조정하는데 외국자본의 영향력까지 이용한다면 해당부문은 보다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구조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 그룹은 자본의 국적을 주장하며, 외국자본은 단기차익실현에만 관심이 있을 뿐 기업을 장기적으로 경영하고 존속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다고 반박한다. 론스타의 2003년 외환은행 인수 사건이나 SK-소버린 사태가 그 증거다.
장하준 그룹은 '자본의 국적성'을 기업이 성장과정에서 소속된 국가공동체의 경제정책에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예컨대 현대나 삼성은 발전국가의 특혜적 지원 속에 성장) 오늘날 초국적기업들은 그들의 초창기 성장과정을 돌아본다면 역사적으로 무역 이전의 국가공동체에 책임이 있다는 논리다. 여기서 국가는 영리활동의 공간적/역사적/제도적 배경이다.
'국가브랜드'라는 비가격변수를 추가적으로 고려하면, 시장에서의 경쟁은 단순히 가격에 의존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일본기업이 보다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에도 불구하고 Made in Japan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다국적 소비자들의 선호에서 비롯하는 편익이 생산요소로서 일본인의 노동을 고용하는 비용보다 크기 때문이다.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는 자국민을 고용하는 것이 자본유출(소득이전)이 적어 내수진작에 효율적이기 때문에 정책당국으로서도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든가 법인세 감면과 같은 세제혜택을 통해 국적(과 같은 소속감/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세수증대의 측면에서도 자국기업의 국제적 성장이 일본정부에게 도움이 된다.
세계화 시대라며 모든 나라가 외국 기업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자국의 산업을 지원하는 보호무역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이중적 현실의 이면에는 이같은 사정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흔히 무역/자본자유화로 대표되는 세계화는 산업경쟁력이 세계적인 수준에 있는 나라들이 타국의 소비시장을 점유하려는 의도에서 주장하곤 하는 것이다. 세계화론자들은 비교우위론을 제시하며 무역의 윈-윈을 말하지만, 그것은 생산물시장에 국한될 뿐 생산요소시장의 개방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미국이 노동시장을 개방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무역/자본자유화를 가능케하는 FTA를 주장하는 선진국의 관료들을 시장주의들이라 보기 어려운 이유다. 개도국의 관료들이 선진국이 제안하는 방식의 FTA를 주장할 경우 그건 정말 시장주의적 신념에서 비롯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정말 비교우위론에 근거한다면, 무역 상대국에 노동시장의 개방을 요구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산업기반이 튼튼한 국가의 상대적으로 산업기반이 취약한 국가와의 자유무역은 (산업강국 기업의 이윤기반이 되는 소비시장을 넓힌다는 의미에서)곧 보호무역인 셈이다. 한 쪽에게만 자유무역이 곧 보호무역의 되는 기울어진 세계화는 충격적이지만, 진실에 가깝다. 개발도상국의 관료들이 강대국의 관료들에 비해 무역외교에 신중해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