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나라 경제 분야에서 개혁을 말하는 중심에 재벌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박근혜나 안철수나 문재인이나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특히 재벌규제/제한/개혁을 표방하는 것만큼은 똑같다. 이런 상황을 두고 '재벌때리기'라는 말도 나온다. 1원 1표의 시장원리를 1인 1표의 정치로 제약하고자 할 때 경제민주화의 목표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완화하는 것만은 아닐텐데, 유독 재벌의 영업을 제한하고, 재벌의 초과이익을 공유하자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재벌의 지대한 사회적 공헌에도 불구하고 부자에 대한 박탈감이 그들에 대한 적대적인 여론을 형성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대기업 중심의 시장독점이 독점자본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면서 빈부격차를 확대하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대기업 중심의 주주자본주의에 우호적인 집단은 부유한 기득권 계층 및 자본인 반면, 부정적인 집단은 일군의 개혁적 경제학자 및 사회정책담당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자본력을 통해 시장지배적 지위를 구축하고 이를 남용하는 재벌/대기업이 사회적 후생수준을 저해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한 사회의 경제적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런 까닭으로 대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개혁진영에서 나오고 있는데, 그와중에 정승일과 장하준의 주장이 눈길을 끈다.
장하준은 2005년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한국경제의 문제는 대기업이 아니라 IMF이후 주주자본주의의 경향이 심화되어 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2012년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도 같은 주장이 심화되고 있는데, 이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주장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기존의 개혁세력의 입장과 어긋나는 부분이다. 현재 한국에서 개혁진영 내부의 논쟁으로 알려져 있는 이같은 대립은 정태인이 처음 제안하여 촉발된 프레시안의 '한국경제 성격논쟁'(http://www.pressian.com/article/ttag_article_list.asp?Tag_String=%C7%D1%B1%B9%B0%E6%C1%A6+%BC%BA%B0%DD%B3%ED%C0%EF)에서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국에서 꽤 오랜기간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비롯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해온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재벌로 지칭되는)대기업의 영향력(권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적인 경제구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 온 장하준이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대기업이 누릴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국가의 산업정책과 연계하여 고용을 창출하고 혁신의 압박을 높이자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IMF이후 급격히 주주자본주의화되고 있는 한국경제가 단기적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성장동력을 잠식당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재벌이 누려온 역사적 특혜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재벌은 한국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한국기업'이므로 한국경제를 위해 적절히 이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공저자인 정승일도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꾸준히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한국의 소위 '개혁적' 경제학자들을 비판한다.
나는 장하준, 정승일의 진단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경제개혁실천연대(경실련), 경제개혁연대 등을 통해 주주자본주의의 헤게모니 내에서 재벌의 권력은 견제되어왔으나,(김상조의 진단처럼 그 효과가 미미했다 할지라도) 자본자유화는 외환은행 론스타 인수 사건이나 소버린의 적대적 M&A시도 같은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90년대 중반 이후 국가주도의 산업정책보다는 시장주도의 혁신, 자본자유화를 비롯한 개방경제의 심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의 노출과 같은 배경이 있다. 지금과 같은 재벌의 소극적인 경제활동은 재벌개혁이 미진했던 탓이 아니라 너무 잘, 그것도 시장주의적인 방식으로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는 한국경제사를 생각할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결국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한국 재벌의 경영권 위기문제가 대두되었고,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한국경제를 대외경제여건에 취약한 구조로 만들지 않았던가.
장하준 집단이 비판하는 개혁적 경제학자들의 경제민주화 담론에도 일리가 있다. 어쨌거나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여 사회통합을 마련함으로써 복지국가 모델을 추구하는 주장의 정당성을 의심하진 않는다. 그러나 장하준 그룹이 반복하여 세차게 비판하고 있듯이, 개혁세력의 경제학자들도 결국 '시장주의자'이다. 특히 금융시장에서의 자유주의는 한국의 중요한 기반이 되는 산업부문을 투기자본에 노출시켜 생산성을 저하시킬 위험이 있는데, 시장주의자들은 환율과 금리를 자유화하는 등 국내의 자본시장을 개방하고자 하는데만 주력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경제민주화는 완전경쟁시장을 이상적 모델로 하는 중소기업중심의 경제로, 생산의 이해관계자(주주, 경영자, 노동자, 하청업체 등)를 세력화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라기보다는 시장규율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주장이라는 비판도 빠지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까지 가열찬 비판은 '허수아비 때리기'라는 비판을 역으로 받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개혁적 경제학자들이 다 시장주의자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장하준 집단의 비판은 자신들의 논지를 벼리기 위해 가장 극단적인 경우를 상정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그들의 비판이 특히 정운찬이나 유종일, 이한구 같은 사람들에 집중되어있다는 일각의 견해도 있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장하준 집단의 취지를 이해하여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정태인이나 김상조의 주장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편이다. 정승일이나 장하준이 얼굴이 벌게져가지고 개혁세력의 재벌개혁을 비판하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의 비판에는 국민경제에 대한 거시적 우려가 깊이 새겨져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논의가 그 이상으로 나아가 비약이 생기기도 하고 정태인 같은 이에게 격한 비판을 토해내기도 하지만,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히 '보편적 복지국가의 선구축과 산업정책을 통한 대기업의 규모의 이익 선용'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장하준 집단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의 세력화라든가 초과이익공유제의 취지에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처럼 한국의 자본시장이 개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재벌의 영향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빈부격차와 실업을 해결하려다가 경영권을 위협함으로써 장기적인 성장동력을 갉아먹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한국과 같은 노동배제적 자본주의에서 자본과 노동의 타협과정에서는 자본의 힘이 보다 많이 반영되는 경향이 있다. 장하준 그룹의 '대기업과의 사회적 대타협'주장이 어딘가 빈약해보이는 이유다. 그렇지만 장하준 집단에게는 주주자본주의화된 산업정책이 폐기되고 대기업이 투자를 꺼리면서 저성장시대에 돌입하는 것만큼은 안된다는, 그러니까 어느정도 네거티브적인 판단이 강한 것 같다. 오지 않은 미래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예상되는 최악을 막기 위한 판단같은 느낌이 든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