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말이야. 저렇게 관념적인 물질을 본 적이 없어. 저건 욕망이란 관념 그 자체야. 갖고 싶다, 갖고 싶은 마음 그것 자체. 그렇잖아? 그게 아님 저게 뭐겠어? 그게 아니면 저 괴상한 물건이 도대체 뭐겠냐고. 날 갖고싶지? 날 사고 싶지? 이런 데서 살고 싶지? 그렇게 외치고 있잖아. 이건 내 귀에만 들리는 거야? 나는 저게 갖고 싶으니까? 근데 너는 그렇지 않으니까?

  만약 사람들이 더이상 원하지 않게 되면 저것들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말거야. 그게 유일한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저건 이 도시를 만든 사람들의 욕망 그 자체니까. 저걸 원한 건 우리들이야. 그래서 이 도시가 이따위로 생겨먹은 거야. 우리가 이런 모습의 도시를 원했으니까 이런 모양이 된 거라고.
  물론 너는 저게 싫어. 전혀 원하지 않아. 하지만 이미 너도 우리들 중의 하나야. 그건 너나 내가 정하는 게 아냐. 그냥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너가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어. 세상은 이따위로 생겨먹었어. 세상은 너 혼자 아름답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무너져내리고 마니까. 그러니까 막으려고 들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저것들을 사랑하게 만들려고 할 거야. 그런데도 니가 말을 듣지 않으면?
  너는 파괴당할 거야. 짓밟힐 거야. 너는 절대로 못 이겨. 절대로. 그리고,그러니까, 풀.
  너는 절대로 지면 안 돼.
  너는 절대로 파괴당하면 안 돼. 너는 포기하면 안 돼. 짓밟히더라도, 살아남아야 해. 이게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야. 포기하면 안 돼, 절대. 살아남아야 해, 끝까지. 무슨 뜻인지 알겠어?


  - 김사과, 「풀이 눕는다」, 2부 끝자락.




  차라리 쇼킹하고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사과를 나는 왜 읽고 있나. 오늘 이 책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이 젊은 소설가를 우연히 알게 된 건 지금은 흔적도 잘 남겨져 있지 않지만 2011년 2월에 넷상에서 잠시 논란이 되었던 김영하-조영일의 논쟁 덕분이었다. 밥벌이 수단으로서 문학의 사회적/계급적 성격과 그 책임을 주장한 조영일에 맞서 김영하는 문학의 순수예술적 측면을 주장하면서 논쟁은 각자의 블로그를 통해 이어졌다. 지금은 김영하가 자신의 글을 다 지운 상태지만, 꽤 많은 글들이 대략 보름 정도의 기간동안 오고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논쟁은 김영하와 조영일의 블로그를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그에 따라 많은 댓글이 달렸다. 당시 조영일을 지지하는 김사과의 글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트랙백이 걸렸다.


(김사과는 그 글을 당시 공개된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었는데, 현재 김사과 블로그는 비공개상태다. 그러나 그녀의 글은 많이 퍼날러져 있으므로,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한 뒤에 '퍼오는 글' 메뉴에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에서 퍼온 글로 올릴 생각이다.)


  그 글은, 김현의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에 비견될 만큼 개인적으로 내 가슴을 후려치기에 충분했다. 그때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나는 김사과를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최근 그녀의 소설을 찾아 읽게 된 건 단지 그 때의 그 강렬함 때문이리라.

  

  그녀의 소설 「풀이 눕는다」를 아직 다 읽지는 않았다. 「미나」는 읽었다. 아직 그녀의 소설을 다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드는 느낌은, 그녀가 2011년 2월의 어느 날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밝힌 작품론에 충실하게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한 문장이 떠올라서, 「풀이 눕는다」의 저 부분을 옮겨놓게 되었다. 네가 하는 일이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각과 작품이 일치하는 소설가. 그걸 당당히 밝힐 수 있고, 그 소신대로 소설을 써나간다는 점에서, 그녀는 자신을 잘 아는, 신념이 확고한 소설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좋은 인연이 되어, 나는 소설만으로는 소화하지 못했을 감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건 분명 인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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