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나는 '책읽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구분한다. 공부와 독서는 구별된다. 공부하지 않는 20대는 없어도 책읽지 않는 20대는 많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책만 읽냐', '쟤는 책은 안 읽고 공부만 해' 하는 등의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빌려 읽는 것과 학교 교재/시험문제집을 들고 연습장에 옮겨적으며 외우고 문제를 푸는 것은 확실히 구분된다. 공부가 다분히 기술적이라면, 독서는 그런 기술적 의미에 긍정적 가치가 덧붙여진 단어다. 독서와 공부의 분리, 이건 '독서가 곧 공부다'라고 배운 것과는 다른 현실이다.

  학교 다니는 내내 '교과서'라는 것을 들고다니면서도 '이제 책 좀 읽어야겠어. 사람이 무식해지는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경제학을 공부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다. 경제학 교재에는 수학이 상당히 많다. 그러니까 경제학도들은 경제학을 하는지 수학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을 하며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이다. 수학책을 읽으면 사람이 무식해진다는 말인가? 많은 천재들이 수학자였는데?

  따져묻기 시작하면 독서와 공부를 분리하는 사고방식은 어딘가 이상하다. 하지만 같은 경제학도로서 저런 말을 듣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에서 공부란 '시험공부'이고, 그것은 문제를 맞추기 위한 것이다. 사교육의 첨단국가답게, 사교육계에서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모든 시험에는 규칙이 있고, 경향이 있다는 식이다. 공부는 '기술적으로' 해야만 시험을 잘 볼 수 있다는 마케팅 전략을 펴는 셈이다. 이런 사교육공화국에서 공부는 다분히 시험을 위한 기술적 접근을 요하는 행위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시험위주의' 공부는 삶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내면을 빈곤하게 한다. 시험은 잘 보는데, 빨래 하나 제대로 못하고 밥 한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인간은 늘어난다. 어디가서 역사/문학과 같은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남들이 아는 만큼만, 그러니까 시험에 나오는 만큼을 알고 서로 공감한다. 갑신정변은 1884년에, 갑오개혁은 1894년에 일어났다. 그뿐이다. 김옥균은 실패한 불쌍한 혁명가, 그래 끄덕끄덕 그거 몇년도 수능에 나왔었는데 내가 틀렸었지 맞았었지 하는 식의 대화. 조선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김옥균을 암살한게 홍종우였다고 하면 여기서부터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된다. 교과서에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 아는 사람은 이른바 공부뿐만 아니라 '독서'를 한 사람이 된다. '책 좀 읽은 사람'은 시험을 잘 본 사람과 달리, 남들이 모르는 걸 알고 있어야만 한다. 남들이 모르는 지식은 허영의 대상이 된다.

  만날 미시경제학 책과 씨름하면서 '책 좀 읽어야겠다'고 말하는 대학생이 벗어나고자 하는 '무식'에는 그 정도의 허전함이 새겨져 있다. 물론 독서가 그 이상의, 혹은 그 외의 다른 효과도 있다고 추측은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그들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어쨌든 똑똑해지겠지'하는 막연한 기대만큼은 분명히 들어있다. 독서를 하면 뭔가 얻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함수관계를 상상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일상에서 나는 독서와 공부를 구분하며 대화한다. 내 생각에 기술적 의미의 공부는 독서에 포함된다.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이 있다고 할 때, 수학문제집을 풀며 '수학문제는 끝도없구나'라든가 '수학문제를 풀 때의 몰입감은 재미없는 법조문을 읽을 때에 비해 압도적이다'라는 식의 깨달음도 배움의 일부일 것이다. 배움이란 어디에나 있는 것이고, 아무리 기술적인 행위라도 어느 지점까지 가다보면 통찰이 생기게 마련이다. 시험공부만 해서 무식해진다기보다는, 시험공부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무식해지는 경향이 크다.

  독서가 공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할 때, 독서에서 공부를 제외한 부분은 아마 사유나 성찰과 같은게 아닐까 한다. 물론 이건 내가 하는 소리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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