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있는 집으로 이사온 뒤 아버지는 직장을 옮기셨다. 그 후 1년쯤 뒤, 아버지는 이전 직장의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꽤 오래 계시던 직장이어서, 아버지와 오래 일하신 분들이 많았다. 자그마치 열 명쯤 되는 분들이었는데, 아버지보다 높은 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직원의 비율이 의외였다. 열명 중 네 명이나 되었던 것이다. ( 초대된 손님들은 모두 신입사원이 아니었고, 최소한 입사 7년차 이상은 되는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집 근처에서 이전 직장을 떠난 지 1년도 더 되었는데도 초대에 응해준 손님들에게 기꺼이 한 끼의 식사를 대접했다. 우리 집에서는 간단한 주안상과 함께 집들이가 준비되어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안주를 만들며 손님을 맞았다. 오랜 직장동료들이라서인지 분위기는 정다웠고 제법 늦은시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대체로 만족스러운 분위기였고, 나는 아들로서 집들이하는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했다(!).

  사람들을 보내고 우리 식구들간의 간단한 뒤풀이 시간이 이어졌다. 가장먼저 노총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 건 어머니였다. 우선 생각보다 노총 사람들이 예전만큼 못 먹더라는 말. 이미 90년대부터 아버지의 직장동료들을 몇 번 대접했던 어머니로써는 굉장했던 노총 사람들의 식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 했던 집들이에서만 해도, 많이 준비했지만 사람들의 무지막지한 먹성에 음식이 모자랐던 기억이 악몽같았다고. 그래서 이번에도 잔뜩 준비했건만, 사람들이 그때만큼 잘 못 먹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분위기. 아직 거친 노동운동의 잔상이 남아있던 90년대 초 사람들의 어딘가 투박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더라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여직원들은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여직원들의 비중도 늘어났다는 말씀까지. 그리고 과거 노총의 여직원들은 '여성적'이기보다는 총명하고 당차기만 했는데, 이젠 제법 여자다운 직원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 놀랐다는.

  어머니께서 느끼신 '노총의 변화'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 학회생활을 하며 느낀 변화와도 어느정도 부합하는 구석이 있었다. 우리학교 경제학회는 3개가 있는데, 나는 그 중 가장 나이많은 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오래된 학회답게 이런저런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깨진 한 개의 전통은 '여성'을 받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학회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에는 여학생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73년도인가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21세기까지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2001년인가 최초의 여학회장이 탄생하고, 이후 여학회원의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35%쯤 되려나?) 그렇지만 09년에 내가 처음 학회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여자 동기들의 비율은 30%가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비율은 경제학과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경제학과 신입생의 남녀비율은 6.5:3.5쯤 된다.) 우리학회의 마초적 성격에 기인하는 측면도 있었다.

  한창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던 09년 하반기와 10년 상반기에 나는 '마초적'이라는 단어를 유난히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여자 동기들의 목소리를 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학회는 토상 여학우들이 서식하기 버거운 곳이었다. 학회 뒤풀이는 꼭 학교 앞의 저렴한 술집이었고, 취하도록 마시며 붉으락푸르락하게 놀곤 했으니까. 이런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학우들은 주량이 넉넉하거나, 취하고도 마초들의 기운에 주눅들지 않을만큼 드세야 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면 어김없이 돌고도는 음담패설을 버텨야 했으며, 집에서 통금을 독촉하지 않아야 하는 등 제법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한 두어번 학회 뒤풀이에 나오다가 학회에서 커플이라도 생기면 그 다음 주부턴 학회 활동 자체에 소홀해지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2005년에는 신입 여학회원들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선배들이 빡빡하게 굴어서 반이 탈퇴하고, 다른 선배들과 스캔들이 나서 절반이 탈퇴했다는 말도 있었다.

  물론 선배들은 그런 현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애들은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눈치.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어김없이 여자들이 사회생활하기는 어렵다는 식의 결론으로 흐르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선배들의 진단은 커다란 장벽과도 같아서, 반박을 해도 먹히지 않았다. 마초사회라는 한국사회의 대전제에서 조직구성원으로서의 여성은 그렇게 폄하되고 있었다. 그게, 싫었다.

  우선 여자 동기들의 참여를 보다 독려했다. 2학년 새터 때에는 우리 학회에 가능한한 많은 여자 후배들을 들이고자 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여자 동기들과는 그런 후배들이 함께 서식할 수 있는 학회 내부의 어떤 흐름을 만들고자 했다. 물론 내가 이런 방향의 목표에 발벗고 나선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방향으로 조직의 성격을 바꿔보려고 알게 모르게 신경썼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게 의미있었던 시도였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집들이 자리에서 한 여직원 분이 어머니께 했던 말이 기억난다.

  "본부장님이 정책본부에 신문물을 많이 전해주셨죠. 만날 소주만 먹다가 치즈에 와인도 먹어보고, 송년회로 다같이 영화도 보고 말이에요. 맞다, 그 뭐더라, 재즈도 노총에 본부장님이 전파한거에요"

  그렇게 말하는 여직원의 눈에는 과거 노동운동의 '거시적'정서를 벗어난 듯한 문화적 갈증이 담겨있었다. 물론 그 뒤에서 담배를 피우던 베테랑 여직원에게선 여전히 그 옛날의 거친 정서를 느낄 수 있었지만.

  내가 입대한 후 학회에는 11학번이 굉장히 많이 들어와서, 학회 내부의 남녀비율이 거의 5:5에 육박한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나의 노력이 유효했다고 믿고싶어지는 소식이었다. 질적으로 얼마나 의미있는 성과였는지는 한동안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양적인 성과는 거둔 것이 아닌가말이다.

  조직에서 보다 여성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말해지는/말해지지 않는 뜻을 헤아려야 한다. 하지만 작은 조직에서 그런 섬세한 정치를 기대하긴 어렵기 때문에,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남녀불문 '뜻깊은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건 '여성중심적'이라는 무수한 동기들의 적대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조직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독려할 수 있는 수단이다. 특히 세미나 준비과정에서 최대한 이런저런 역할을 맡아 빠듯하게 준비하고 발표하면 학회에 충실히 기여함과 동시에 각자 모두 뿌듯하다. 세미나는 자유로운 배움의 목표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기획이었던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