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역사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이의 삶은 '첨단 자본주의 사회'의 실현일 것이다. 자본주의를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시키고, 그 다음에 제n인터내셔널 따위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현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한 뒤에,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고자 할 것이다. 사적 유물론은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한 '미래의 정치학'이다. 때문에 유물론의 논리는 하나의 사유실험일 수밖에 없다. 믿지 않으면 그 논리를 따라 살아갈 수 없는 까닭에,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의 태도는 종교적이고, 근본주의와도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이 교조주의자들은 이런식의 주장을 할 법도 하다. '자본주의의 고도화를 위해 전지구적 자유무역을 옹호하고 글로벌기업의 영업의 자유를 보장해야한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우를 극좌의 트로이 목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말이다. 현실정치에서 이런 낭만적 주장은 허용될 수 없다.) 물론 이는 사적 유물론의 여러 단계 중 현실을 '자본주의'단계로 파악하는 경우에 한해서 가능한 주장이다. 뭐랄까, 프롤레타리아가 들고 일어날 때까지 글로벌한 착취를 극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조건부 부르주아론'이라고 불러야 할까?
물론 이런 추론은 '사적 유물론을 신봉하는 교조주의자'를 가정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교조주의자는 언제 올지 모르는 '사회주의'라는 메시아를 기다리며 자신이 해방시키고자 하는 노동자를 착취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 해방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저항을 조직화할때까지 착취를 극대화해야한다는 식의 해석은 타당하지만 적절하지는 않다. 하지만 과학이 아닌 유물론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믿을 때 근본주의는 시작되는 것이다. 유물론에 충시한 이들이 더러는 노측에서 저항을 극대화하고 사측에서 착취를 극대화하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경우, 양측의 논리는 모두 타당하다. 역사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단계별로 분절하여 마치 그것이 객관적 실체인 양 들이대며 운동이니 해방이니 운운하는 태도는 모두 교조적이다. 극좌와 극우가 맞닿는 지점도 그곳에 있을 것이며, 그들의 종교적 태도는 현실정치에서만큼은 배격되어야 한다. 그들은 믿음의 화신일 뿐, 대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