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지난 3학기가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지난 3학기... 그 3학기가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외식을 했다. 

아마, 2~3년 전쯤에 갔던 고깃집인 듯하다.  

그가 일산밖에 모르고 살아가던 시절. 

그런데 새삼 이 모든게 낯설다. 

맛난 고기가 있고, 화목한 가정이 있다. 

그리고, 어색한 그의 모습이 덧붙여졌다. 

 

 

고3때부터 줄곧 책을 부여잡고 살아왔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내적인 의지와 필요, 그리고 강박. 

책을 읽어야겠다는 강박은 공부와는 또다른 형식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날이면, 아무 것에도 몰입할 수 없는 날이면 

시간을 삼키기 위해 스타크래프트를 했지만 

그렇다고 그 넉넉한 일상의 시간들을 놀기 위한 계획에 할당해오지는 않았다. 

계획하지 않아도 그는 곧잘 놀곤 했다. 쓸쓸하게.

 

책은 다만 생활이 되었을 뿐이고, 가슴의 헛헛함은 

무조건 누군가와 어울려 논다고 해서 달래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책은 일상이고 놀이는 예외였다. 

모두, 삶의 일부였지만 그런 시스템으로 그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있었다. 

하나의 매트릭스로부터 또다른 매트릭스로의 전환. 

자기혁신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이 시기를 그렇게 부를 수 있으리라.

처절하리만치 힘들었지만. 

 

삶 전반에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 쉽지는 않다. 

고3 재수 기간동안 그는 '내면의 혁명'을 추구했다. 

그 이전과의 생활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으니, 엄격해져 보는 것도 좋다고. 

 

그런 시간 끝에 대학에 입학했고, 2년의 수련 기간동안의 내공은 

고스란히 대학생활에 반영되었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그를 향한 여러 시선의 층위. 

달리고 달렸다. 

대학 입학을 앞둔 2년의 준비기간을 통해 

그 자신의 시간은 탄력을 받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3학기가 흘렀다. 

 

그는 어느 순간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왜 공부해야 하는가 

왜 먹어야 하는가 

왜 이야기해야 하는가 

더이상 그는 묻지 않는다. 

그는 묵묵히 사르트르를 바라볼 뿐이다. 

삶에 이유 따위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작위니까. 

 

다만 그에게 연료가 떨어진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더이상 책을 잡을 수 없었고 

책을 잡을 수 없게 되자 

하루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한다. 

축구를 하고, 사물놀이를 하고, 게임을 했다. 

 

새삼스럽게 뭘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학창시절엔 어쩜 그렇게 재미있게 놀았는지. 

돌이켜보니 그땐 삶의 영역이 좁았고, 마땅히 새로울 것도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런 반복도 좋았다. 

 

긴긴 하루 

낯선 사람들과 친해지고 어울리고 놀지만 

더이상 허전한 놀이는 즐기지 않는다. 

껍데기의 유희를 그만둔 지는 오래되었다. 

놀이는 여전히 즐겁게 흘러가지만. 

그것은 존재의 축이 굳건할 때의 이야기다. 

 

그는 다음 주에 있을 사촌동생들과의 만남을 생각한다. 

그가 어렸을 때, 사촌동생들과는 무엇이든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새삼스러운 고민을 한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놀 것인가. 

 

그만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다. 

시간은 흘렀고, 사촌동생들도 세상의 이치에 부대끼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달라진 상황에서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해야 할까. 

아니, 이야기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친했는데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 

 

아이들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이야기, 즉 정체성 없이도 모든 관계를 이어나간다.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걱정과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고,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있다. 

 

이 모든 변화를, 어떤 식으로든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불안의 꼭대기에는 중심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구심점. 구심점 없는 삶은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다. 

당위는 없으며, 응시하는 시선만이 배경음악이다. 

 

다시 음식점으로 돌아온다. 

부모님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3년 전과 같다. 

그의 부모는 여전히 3년 전과 같은 이야기들을 하며, 

그는 지겨워하는 것조차 지겨워졌고, 지겨움에도 지쳐버렸다.  

 

그는 변한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구르지 않는 바퀴에는 멈춤과 동시에 불안이 엄습한다. 

더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으므로, 

어디로 움직여야 할 지 모르겠으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하고 싶을 뿐이다. 

잠시 멈추어도 좋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그것은 지난 몇 년의 달려온 거리에 대한 보상이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먹고 자고 싸고 있다. 

원하든 않든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다. 

爲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비명은 고통 그 자체다. 

이것은 건강의 문제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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