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브루클린 경찰서의 사건 기록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브루클린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한 흑인 청년이 지갑을 열어 연신 백달러짜리 지폐를 세고 있었단다. 이 바보 멍청이 같은 놈은 생애 첫 월급을 탄 것이다. 뉴욕의 지하철에서 지폐를 세는 것은 아주 위험한 짓이다. 더구나 브루클린같은 곳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때 한 할머니가 흑인 청년에게 다가왔다. 멕시코에서 불법으로 이민을 온 할머니는 자신의 손녀가 단돈 칠백오십이 달러가 없어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칠백오십이 달러가 적힌 병원비 청구서를 흑인 청년에게 보여주며 "이 돈을 내지 않으면 치료를 계속 받을 수 없대요" 하고 말한다. 흑인 청년은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할머니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칩시다. 그리고 저에게는 마침 팔백달러가 있어요. 그런데 제가 왜 이 돈을 할머니에게 드려야 하는 거죠?" 흑인 청년이 묻는다. 

  "당신에겐 앞으로도 수백 번이나 찾아올 월급이지만 내 손녀에게는 한 번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그 귀중한 목숨에 대해 한 번만 생각해주세요." 

  그러자 흑인 청년이 피식 웃으면서 말한다. 

  "할머니와 저는 단지 우연히 이 지하철을 함께 탄 것뿐이라고요." 

  흑인 청년은 지하철 정거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브루클린의 뒷골목에서 칼에 찔린 채 살해당했다. 단돈 팔백 달러 때문에, 지하철에서 청년의 지갑을 본 흑인 갱들의 소행이었다. 피 묻은 칼을 닦으며 한 명이 말했다. 

  "운이 없군. 내가 탄 지하철에서 돈을 세다니." 

  그리고 그 갱들은 멕시코 할머니의 제보로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에게 할머니가 한 말은 간단했다. 

  "지하철에서 저 흑인 갱들을 봤어요." 

  죽어가고 있던 가여운 멕시코 소녀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지만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교훈은 뭘까? 지하철에선 함부로 돈을 세지 말자? 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 불우한 이웃을 외면하지 말자?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흑인 청년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당신과 나는 천만 명이 넘게 살고 있는 이 매머드 도시에서 그저 퇴근시간에 우연히 함께 지하철을 탔을 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당신이 나에게 이름도 모르는 소녀의 생명을 위해 한 달 월급을 달라는 것은 무리다. 나는 이 도시의 평범한 소시민이고 평범한 소시민들이 천만 명 모여 사는 이 도시의 연대의식은 생각보다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내가 당신의 슬픈 얼굴을 한 번만 외면하면 나의 지갑은 한 달 내내 두둑하다. 그리고 다음날 내가 만날 사람들 중에 당신이 있을 확률은 산술적으로 천만 분의 일이나 된다. 게다가 우리들의 한 달 월급은 이 도시에서 생존하기에 거의 최적화된 돈이다. 내가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이 도시에서 도대체 얼마나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러니 이 이야기에 교훈 따위는 없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건 교훈을 찾으려 하고 잠언을 얻으려 하지만 교훈과 잠언은 결코 우리의 인생을 바꾸지 못한다. 이 이야기의 결론은 바로 이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같은 지하철을 하고 있다!" 

 

- 김언수, 『캐비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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