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음이 뭔지 알아요. 그것은 시간을 입금해놓은 자신의 통장에 잔고가 하나도 안 남아 있는 상태죠. 이미 다 써 버렸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차압당했거나. 별다른 건 없어요. 그저 파산한 삶을 복구할 잔고가 없는 거죠. 

- 캐비닛. 

  우린 이 순간을 절망, 고독, 회한, 후회, 회의와 같이 다양한 말들로 표현하죠. 

  그러니까, 그 순간에 시간을 빌려올 수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말 그대로죠. 시간을 빌린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구요? 당연하죠. 살면서 사람은 누구나 시간을 빌리며 살죠. 항상 그러진 않지만. 평소에는 넉넉하다가도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순간이 있죠. 우울증이 대표적이죠. 그 순간에 누가 말만 들어줘도 죽게 되진 않을 수 있어요. 친구는 그런 거에요. 내 통장에 시간을 보증해주죠. 사람은 살면서, 서로의 시간을 보증해주고 살아가는 거니까.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죠.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빌릴 수 있고, 그건 다른 사람으로부터만 가능해요. 경제학적인 맥락에서는 시간을 입금하지 않고 돈을 입금하니까, 이런 시스템을 두고 '금융'이라고 하죠. 하지만 삶의 순간에서, 우린 이런 것들을 '인연'이라고 한답니다. 불교적으로 이해하면 가장 그 뜻이 가까울 거에요. 인연이 이어지면, 우리에겐 아직 삶을 복구할 잔고가 남아있는 거죠. 

  어른들로부터, '다 빚지고 사는거다'라는 말 들어봤죠? 오래 살면 깨닫는 거에요. 돈 빌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도 통장에 시간이 없으면 끝이에요. 시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조금씩 빌려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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