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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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권혁란씨는 자신에 대해 책표지에서 "불문곡직, 용띠"라고 소개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는 이 사자성어는 세상이 정한 복잡한 잣대나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나만의 방향과 자리를 찾아 거침없이 걷겠다는 주체적인 선언으로 들린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에서 일하며 잡지와 책을 만들었고,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등의 책을 써내왔다.

'인간에게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하는 인문 에세이다. 저자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개성과 사회적 맥락, 그리고 특별한 관계성이 교차하는 정체성의 집약체라고 말한다. 소설, 영화, 시, 노래 등 장르를 넘나드는 20편의 작품을 통해 호명되지 못한 자들의 슬픔과 이름을 찾으려는 열망을 톺아보며 이름이 남긴 자국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름이 특이해서 학창시절 선생님들에게 자주 이름을 불렸던 나로서는, 이름이 없는 1부 무명의 존재들이 그저 비극으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이름을 빼앗기거나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의 고통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2부에서 스스로 이름을 짓고 호명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물이든,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고 불러주는 행위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 부여이자 애정표현이다. 이름을 지어 호명하고 지칭하면서 관계가 결속된다. 마음의 밀도를 보여 줄 수 있는 고도의 정성이 깃든 의례이기도 하다.”(p.54)

3부에서는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는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을 다룬다. 김소월의 시 <초혼>을 인용하며 “나는 선채로 이대로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이름이, 어디 있기는 했던가.”(p.138) 자조한다. 그러면서 “산 자는 죽은 이의 이름을 ‘설움에 겹도록 부를’뿐이다. 부르다가 죽을 이름을, 어쩌면 부르다가, 부르다가 내가 살 이름을.”(p.139)이라며 흩어지고 사라질 것들을 붙잡아 이 책에 남긴다. 4부는 타인이 준 이름의 맥락을 이해하고자 하고 마지막 5부에서는 이름과 존재가 일치하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이 책과 함께하는 동안 김춘수 시인의 ‘꽃’이 맴돌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랑이 존재에 마법을 거는 시, 정도라고 해석했던 나는 이름에 천착해온 글들이 처음에 그렇게 의미있게 다가오진 않았음을 고백한다. 무명의 슬픔과 고통, 호명하는 사랑, 죽음을 넘은 이름의 의미, 근원으로서의 이름,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책의 구성을 따라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주체성, 정체성, 온전한 내 자신에 이르러 있다. ‘엄마’와 ‘아내’라는 타이틀에 빼앗겨 갈 곳을 잃은 ‘나’를 찾는 여정의 첫 걸음을 이 책과 함께 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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