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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
주성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평점 :
어렸을 적 TV를 틀면 주윤발이 서툰 한국말로 “사랑해요, 밀키스”라는 광고가 흘러나왔고, 아저씨들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언니는 장국영 내한 콘서트에 다녀오며 화보집을 사왔다. 나는 친구들과 홍콩강시영화를 보곤했다. 강시영화가 지겨워질 때쯤, 아저씨들만 빌려보는 무협시리즈 책장에 다가가 똑같은 제목이 40개에 달려있던 , <의천도룡기1986> 1편을 빌려왔다. 아버지가 보던 ‘판관 포청천’과 비슷한 옷을 입은 배우들이 화면에 나왔고 그렇게 나는 양조위를 처음 보았다.
고등학교 때 방송반이었던 나는 매주 금요일 점심시간마다 철 지난 디즈니나 고전영화의 OST를 틀었다. 그러다 극장에서 <중경삼림>을 봤다. ‘California Dreaming’과 ‘몽중인’이 흘러나오는 씬에서 OST의 역할을 이 영화로 처음 경험했다. 그렇게 나는, 그 당시 수많았던 왕가위감독의 팬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책,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를 읽으며 왜 항상 그는 죽거나 남겨지거나 주변 인물들이 그를 떠날까, 궁금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1997년은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는 해였기에 그당시 홍콩영화에는 이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이 녹아있었다. 마치 내일은 없다는 듯이 식칼이나 권총을 들고 싸우는 느와르의 주인공들 역시 비슷한 의미로 다가온다. 왕가위의 페르소나라고 불리기도하고, 이 책에선 다른 여러 감독들에게 “양조위는 모네의 수련이기도 하고, 세잔의 사과이기도 하며, 고흐의 해바라기”(p.11)라는 양조위 배우는 홍콩, 그 자체였다. “영화는 다른 예술과 달리 침묵을 미학으로 만들고,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것마저 이야기로 만든다.”(p.101) 라는 문장에서 ‘영화’를 ‘양조위’로 바꾸면 그의 연기양식을 설명하는 문장이 된다. 과장된 액션이나 폭발적인 감정 분출 대신, 절제된 몸짓과 수만 가지 감정을 담은 눈빛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전달하는 그의 연기는 홍콩이라는 도시가 처한 운명과 닮아있다. 그의 40년 연기 인생, 즉, <화양연화>의 1960년대부터 일국양제가 끝날 20년 후의 <2046>년까지, 왕가위 감독이 영화에서 다루었던 모든 시간대를 온몸으로 관통해낸, 홍콩을 한번도 떠나지 않은, 유일한 배우라는 리스펙트를 담은, 주성철 저자의 ‘양조위 평전’인 셈이다.
그리고 “확신의 주인공상”(p.75) 유덕화나, “한국광고 최초의 외국 연예인 TV CF 모델”(p.59) 이었던 주윤발, 장국영, 주성치와 같은 그 때의 홍콩배우들의 이야기는 덤으로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그가 나온 영화의 제목이 나올 때마다, 마치 어제의 일인 것처럼, 누구와 어디서 보았는지가 떠올랐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넷플릭스가 줄 수 없는 추억이다. 나 역시 홍콩영화와 함께 나이를 먹었구나, 싶은 마음에 서걱거린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OST는 아직도 소장중인 <Happy Together>다. 가사 중, 후렴부분인 “I can't see me lovin' nobody but you for all my life. When you're with me, baby, the skies will be blue for all my life” 즉, “난 다른 누구도 필요없어 너만 있으면 돼. 네가 내 옆에 있다면, 하늘은 항상 파랄거야”
표지의 양조위는 이구아수 폭포가 쏟아지는 배경을 뒤로 하고 파랗게 서 있는 아휘의 모습이다. 아휘는 양조위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었다고 한다. 은퇴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2046년까지 아직 홍콩에게는 남아있는 시간이 있다. 나는 양조위의 연기를 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