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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의 밤 - 네덜란드 은손가락상 수상작
안나 볼츠 지음, 오승민 그림, 나현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평점 :
제2차세계대전, 독일은 유럽의 많은 나라와 전쟁 중이다. 1940년 가을, 런던, 나치의 폭격이 시작된다. 계속되는 공습에 영국인들은 지하철을 방공호 삼아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면 출근하는 일상을 견디는 중이다. 엘라는 열 네살로 불발탄에 한 쪽 다리를 다쳐 지난 일 년 동안 병원과 집에서 격리되어있어야 했다. 치료를 위해 ‘철의 폐’에 갇혀있어야 했는데 이후 좁은 공간에 갇히면 숨 쉬기 힘든 지병을 앓고 있다. 겨우 회복되어 가족의 안전한 밤을 위해 동생 로비와 줄을 서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때 거리의 소년인 열 여섯의 제이를 만난다. 제이는 대피소의 자리를 미리 잡아주는 댓가로 돈을 받으며 살아간다. 로비는 제이를 따라 다니고 싶어하지만 제이가 정당하지 않은 돈을 버는 것 같아 엘라는 못쫓아가게 한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때 여자는 바지를 입어야 한다며 남성용 바지를 입은 열 다섯살의 크윈을 만난다.
소설 첫 페이지에 나오는 ‘먼저 전하고 싶은 말’에서 “우리는 셋이다. 원래 넷이었지만 한 명이 죽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p.5)라고 말한다. 엘라의 시점으로 쓰여있는 이 책은 로비, 제이, 크윈까지 네 명 중 한 명의 예비된 죽음을 먼저 독자에게 알려주고 시작하는 것이다. 나이가 열네살, 열다섯살, 열여섯살이면 우리나라 기준으로 중학생의 나이이다. 여기서 남자아이들은 열여덟살이 되면 군대에 입대한다고 쓰여있다. 그렇다면 열 네살의 엘라는 가장 활발한 나이의 여자주인공이다. 전쟁 중인데다가 일 년을 갇혀 있었고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하는 절망 속에 있다. 유일한 낙은 밤을 보낼 터널의 줄을 서서 기다리며 회색 공책에 쓰는 글이다. “엄마는 (...) 차라리 양말이나 뜨는 게 낫지 그깟 글쓰기가 무슨 소용이겠어?”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 내 손에 있는 이 공책은 나만의 사다리이다. 이 공책은 나에게 침대보가 줄줄이 매듭지어져 길게 늘어진 밧줄이고, 열기구다.”(p.23) 엘라에게 글쓰기는 절망을 피할 수 있는 사다리라고 생각한다. 다른 인물들에게도 이런 사다리가 있다. 동생 로비는 동물원에 가고 싶어한다. 제이는 전쟁이 끝나면 미국행 티켓을 사기 위해 돈을 모은다. 크윈은 감자도 깎을 줄 모르는 귀족 출신의 여자아이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남자들처럼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엘라의 어머니를 따라 자원봉사를 가면서 바닥을 닦고 죽을 끓이고 아이들과 노래를 부른다. 전쟁이라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만의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이 아이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책에서 엘라를 성장하게 하는 몇 개의 키워드들이 있다. ‘부수적인 피해’, 새장, ‘결정’이 그렇다. ‘부수적인 피해(p.107)’에 대해 각주에는 군사 행동으로 인해 민간인이 피해를 입는 걸 뜻한다고 써있다. 이 단어는 세바스찬이 자신을 찾기 위해 가출한 크윈을 가리키며 한 말이지만 엘라는 항구를 떠올린다. 히틀러는 영국의 항구를 폭격하고 그로 인해 수 천명의 항구 종사자와 가족들 역시 피해를 본다. 따지고 보면 엘라의 다리 역시 불발탄으로 인한 부수적인 피해이며 예정된 한 명의 죽음 역시 그렇다. ‘부수적인’이라는 단어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엘라다. 또 세바스찬과 크윈이 생각하기에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할 부모가 만든 ‘새장’에 대해 엘라에게 이야기해준다. 엘라는 “수 세기동안 존재해 온 창살 있는 새장이. 열쇠가 없는 자물쇠. 그리고 장벽(p.164)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의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스스로를 가둔 자신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이라는 키워드는 제이와 엘라가 로비를 찾으러 갈 때 나온다. “네가 결정해. 다시 돌아갈래? 아니면 계속 갈래?”(p.210) (...) 나는 결정을 해야 한다. 돌아가든지 계속 가든지. ‘계속’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나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자유롭게 내쉬어지는 호흡과 나의 맨다리를 어루만지는 바람, 멀리서 우는 올빼미,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땅속 아래에서 숨어지내고 싶지 않은 마음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계속 가자”(p.210) 제이는 수동적인 엘라에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한 명의 죽음에 대해 엘라는 책으로 남긴다. 여전히 엘라는 “나는 터널에 서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p.289)”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엘라는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리고 절망을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앞으로 통과해야 할 터널의 밤을 함께 보낼 이가 있다. 시대와 공간이 전혀 다른 우리나라 청소년들이더라도 이 책을 잡으면 힘과 용기, 그리고 연대가 생생하게 느껴질 것이다. 특히나 예민한 사춘기 여학생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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