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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줄리애나 배곳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3월
평점 :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우리가 혼돈 속에서도 타오르지 않고 이곳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책”이라는 천선란 소설가의 강력추천을 받은 줄리애나 배곳의 SF단편집이다.
원제가 너무 궁금했는데 “I’d really prefer not to be here with you”로 ‘필경사 바틀비’의 대사가 자동으로 떠오르는 문장의 제목이다. 한국어 버전의 제목과 거리가 느껴지는 원제이지만, 한국인 편집자가 선택한 제목이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어 책 제목의 문장은 <포털>이라는 단편에 나온다.
“우주에 구멍을 내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두려워 하는 것, 원하는 것······ 비밀과 수치심도 구멍을 낼 수 있다.”(p.29)
데릭 톰킨스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던 곳에서 포털이 나타나면서 시작하는 이 단편소설 속 포털은 네사 가족의 소파 쿠션 안쪽에서, 물빠진 수영장에서는 음악소리가, 다브로스키의 정원에 있는 타이어로 만든 그네의 타이어속에 생긴다. 포털이 왜 생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 포털은 화자인 ’나’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 호감이 있었던 콜렛 해들리가 할머니와 차 사고로 죽자 그때 이미 ‘나’에게 보였다. 그때 포털 구멍에 손을 넣어보지 못했던 ‘나’는 에이든과 함께 데릭 톰킨스가 발견한 다섯 개의 구멍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나’는 콜렛 해들리의 얼굴을 한번 만져보길 희망하지만 같이 그곳에 간 에이든의 공포와 함께 포털이 생긴 장소와 상관있던 인물의 슬픔과 수치심, 그리움, 기대감, 불안을 대신 느껴본다. 그리고 함께 있었던 에이든 역시 ‘나’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둘은 타이어를 다시 찾아 그 속을 들여다본다. “잉크처럼 검고 별이 총총한 우주가”(p.32) 보이는 곳에서 둘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나누며 이 소설은 끝이 난다. 타이어 속 우주만큼의 행복이 느껴진다. 요새 작가들은 왜 이리 통이 작은 것이냐, 불평도 해보지만 딱 그만큼이라 더 예쁜 것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소설인 <역노화> 역시 재미있다. ‘나’는 외동딸로 최근 3년간 연락을 끊었던 80대의 아버지가 머물었던 한 의료기관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임종 전에 소생술을 포기하는 대신 ‘ “대략 10년 정도를 하루 만에 살게 되는”(p.40) 역노화라는 신기술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보호자라는 명목의 참관인이 필요하기에 ’나‘를 부른 것이었다. 평소 무관심하고 형편없는 아버지였기에 내키지 않은 8일 동안의 동거를 그린다. 80대, 70대, 60대.... 역노화해가는 아버지를 대면하는 서른 네 살의 딸. 섬유예술가라, 그러니까 펠트예술가보다 펠트장이(felter)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는 “뭔가 느꼈던(felt) 사람이라는 뜻이지. 지금, 그러니까 현재가 아니라. 한때 느꼈던 사람. 예전에 느꼈던 사람.”(p.43)이라고 규정지으며 다가올 실망에 대해 두려워하는 ’나‘는 아버지의 역노화 과정을 지켜보며 현재 느끼는 감정에 충실해진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휴지를 준비해둘 것.
내게는 이 책이 소설은 픽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지금 이 순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선물해주는 책으로 다가왔다. 저자가 선물해주는 각자의 포털에 대해 상상할 차례다. 나의 포털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있을지, 그것을 누구와 함께 할지. 그리고 현재 느끼는 내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