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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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베트남 어머니와 한국 아버지 사이에서 파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재일이의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재일이만 파란 피부인 건 아니고 돌연변이처럼 아주 소수의 아이들이 파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는 그런 세계를 그리고 있다. 처음에 읽을 때는 한국에서의 다문화 아이로서의 삶도 녹록치 않을텐데, 여기에 돌연변이 파란 피부까지 재일이에게 덧칠한 작가가 좀 너무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얘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시키는 게 아닌가! 이런 공간의 이동이 다음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는 흥미로 이끌었다. 물론 재일이의 삶은 전혀 재밌지 않다. 어느 장소든 구석에서 얼어있는 애 같았다. 그런데 눈이 있고 마음이 있어 다 보고 느끼는 그런 슬픈 얼어붙은 아이.

다 읽은 지금 이런 공간의 변화로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재일이 아버지이다. 그는 베트남 와이프를 두었으며 한국에서의 직업은 다문화노동자 관리직이었다. 미국으로 간 후 그 다문화노동자들이 하던 일을 직접 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재일 아부지는 미국에서의 백인남성 노동자가 주로 하던 관리직 지위였으나 이민 온 후, colored, 멜라닌을 가진 다문화노동자 계급으로 격하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세계의 법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는 여전히 미국과 같은 편인, 동등한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일이는 달랐다. 학교라는 미국 사회로 내던져진 재일이는, 삼촌과 해먼 교장선생님 그리고 셀마, 파란피부의 백인 친구 클로이를 통해 이런 세계를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졸업 후 이런 세계를 직관하며 파란 피부를 찾아 나서면서 소설은 끝난다. (너무 대놓고 스포했나? 하지만 중간중간 이 아이의 고립된 슬픔이 파랗게 묻어나는 표현은 직접 읽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아니 작가가 자꾸 얘를 뻑하면 찬 물에 담궈.. 가뜩이나 애 삶이 차가운데 ㅜㅜ 그래서 표지가 이런 그림일지도?)

왜 하필 블루 멜라닌일까? 라는 질문이 읽다보면 마구 생긴다. 나에게 블루란 이브 클랭의 IKB같은 의미인데 순수함 이런 것. 그런데 제목이 이상하다. 블루멜라닌을 가진 재일이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면 ‘블루 멜라닌’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블루를 뺀 <멜라닌>이 제목이다. 여기에 작가의 의도가 살짝 엿보인다. 나 역시 재일아부지처럼 한국에서는 다문화아이들과 다르다고, 그래서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인들의 나라에 갔을 때 나 역시 멜라닌이 있어 이유없이 차별받고 격하되는 종족이라는 점을 상기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한국사회라는 우물에 살고 있는 내가 굳이 이 인종주의라는 뜨거운 냄비속으로 작가에 의해 내던져진 이 소설이 파란 멜라닌처럼 낯선 것도 사실이다. 의외로 이런 숙제같은 생각은 이 책 속의 루크, 앤더슨 부인, 윈스턴 보안관 같은 백인그룹을 통해 해소되었다.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얘기해. 언제든, 뭐든.”이라고 말하며 친절해보이지만 경멸의 눈빛을 가진 백인 그룹. 셀마가 토머스 제퍼슨을 언급하며 설명하는 부분이 바로 이 백인그룹에 대한 각주처럼 읽히기도 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역사속에서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하면서 저항할 수 있을 때까지 저항하라고 한 사람이지만, 알고보면 목화솜을 따야하는 노예가 필요했던 남부 출신에 역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노예를 몇 백명이나 데리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 그런 위선이라고 해야 하나 이중적인 면이라고 해야 하나, 돈도 있고 어느 정도 사회적인 위치도 있어 약자를 도와주겠다는, 동정을 베풀겠다는 백인들이다. 나 역시 한국사회에서 다문화사람들을 앞에 둔 나의 눈빛이 수평적인지, 수직적인지 한번 되돌아보라는 그런 의미로 다가오는 인물들이다.

이 소설책을 잡은 내내 마이클 센델이 이야기하던 미국의 모습이 파란 멜라닌을 가진 재일이의 눈을 통해 읽혔다. 그래서 “세계는 무채색이었다.(p.201)”라고 자조했던 재일이의 소설 속 세계가 이 소설 밖에서는 재일이 덕분에 파랗게 물들어가길 응원한다.

p.s 맨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독자’에게 감사하다는 멘트가 적혀 있다. 의외로 이 ‘정체를 알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colored 혹은 어떤 사회에서의 그룹에 속한 독자로 지정하지 않은, 순수한 의미의 형용사로 들렸음을 고백한다. 그래서인지 이 부분까지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파랗게 물들어 버렸다. 이제 내가 가져야 할 것은 재일이가 에필로그에서 보여주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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