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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살지 마라 무섭도록 현명하게 살아라 - 불완전한 인간을 위한 완전한 지혜
발타사르 그라시안 지음, 김종희 옮김 / 빅피시 / 2024년 5월
평점 :
*SNS에서 '유시민 작가가 코칭 받은 말실수 줄이는 법'을 쇼트로 본적이 있다. 그 멘토는 그에게 첫째로, ‘옳은 말인가’, 둘째는 ‘이게 꼭 필요한 말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친절한 말인가’를 생각하라고 했다고 한다. 옳은 말이더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라면 안해야 된다는 것. 여기까지만 해도 충조평판이 다 걸러지지만, 여기에 친절한 말인지를 생각해보고 그렇지 않다면 옳은 말이어도, 필요한 말이어도 하지 않는 게 말실수를 줄이는 법이라는 내용이었다. 와닿았다. 내가 하는 말은 맞고 네가 하는 말은 틀리다식의 화법을 사용하는 한국인에게(그 한국인 한 명 저입니다요) 꼭 필요한 조언이었다. 여기에 유시민작가도 밤에 이불킥하실만한 말실수를 하신 적이 많았나보다...라는 전직 국회의원의 인간적인 모습은 덤.
*옳은 말이 진리이고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고 생각한, 전형적인 한국인에 불과했던 나 역시, 주변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어떤 이상적인 진리를 선망하고 거기에 의지하며 나이를 먹어온 것 같다. 그 진리의 형태는 다양하게 다가왔는데 목사님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책에서 대유행 키워드로 나타났다가 다른 유행어에 사그라들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다가 나오는 중요하지 않은 인물의 대사였을 때도 있었고 지하철을 대기하다가 언뜻 눈에 들어오는 어느 시민이 지은 시구절이기도 했다. 이 다양한 유형으로 나를 찾아오는 진리라고 믿고 싶은 이 개념의 무한복제와 변형을 3인칭시점으로 생각해보니 이것이 세상을 나보다 먼저 살아본 철학자들의 화두가 아닌가 싶다. 이 화두에 대해 오래 고민한 사람들의 기록이 철학일지니. 이 책은 철학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니체와 쇼펜하우어같은 염세주의 철학자를 일으켜 세운 철학자의 단 한권의 책 <사람을 얻는 지혜>에서 핵심문장만을 모은 버전이다. 바르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양, 진리인양 살아온 나에게 그게 아니다라는 길을 보여준 책,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바르게 살지 마라 무섭도록 현명하게 살아라>이다.
“타인은 당신의 성격을 고쳐주지 않는다. (...) 좋은 사람인 척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환대받을 수 없다. (...) 타인은 아무도 당신의 나쁜 성격을 고쳐주지 않는다. 스스로 조율하고, 자제할 수밖에 없다. 항상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잘못된 말을 내뱉지 않도록 주의할 것. 잘못된 행동을 한 뒤에도 자신의 어리석음이 칭찬받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pp.37~38)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초반에 이야기했던 유시민 작가가 코칭받은 말실수 줄이는 법 쇼트가 떠올랐다. 내 스스로가 옳은 말인지, 필요한 말인지, 친절한 말인지 스스로 조율하고 자제하며 잘못된 말을 내뱉지 않도록 주의하는 수밖에 없음을 17세기 스페인 사람인 발타사르 그라시안 역시 이야기하고 있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라. 자신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 행운을 최대한 활용하고 불운을 끊어내자.(...) 용감하고, 행운하는 사람은 행운을 끌어당기지만 나태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행운이 피해 간다. 운이 안 좋아졌다고 느껴지면 갈 길을 바꿔 더 나쁜 상황을 피하자.”(p.155) 철학자이면서 예수회 신부로서 행운과 불운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센스나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라는 문장도 흥미로웠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명언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인데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게 현명하다고 가르쳐주는 이 분, 묘하게 빠져든다.
나 역시 내 주변의 가까운 이들에게 충조평판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 점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일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나이대가 되어가는 요즘, 바르지 않더라도, 현명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필독요망.
p.s 요새 쇼펜하우어식으로 조언해주는 챗봇이 유행이라고 하던데 발타사르 그라시안식 챗봇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