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름
델핀 페레 지음, 백수린 옮김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도 그림책을 쓰고 그린 ‘델핀 페레’의 아들로 보이는 ‘세티’가 주인공인 듯 싶다.
준비되었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들(세티)은 머리에 모자를 눌러쓴다. 엄마와 아들은 할아버지 ‘장’의 집이 있는 시골을 향해 차를 타고 달린다. 커다란 능선이 있는 산들을 지나 저녁이되었다. 차에서 잠든 아들을 안고 이 집으로 들어선다. 책의 초반 장면들이다.
세티의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골집은 엄마가 자란 집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티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신듯하고 할머니는 엄마의 남동생 삼촌이 모시는 듯하다. 1년에 한 번 여름을 보내러 이 집으로 오는 대화들이 오고간다. ‘~한 듯 하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그런건가’하고 독자가 유추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설명은 하지 않고 그저 이 곳의 소소한 일들을 보여주고 아들과 엄마는 대화할 뿐이다. 이런 부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들이 보내는 이 곳의 여름이 고요하면서도 선뜻 받아들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난 지금은 완전 서울 촌년이지만, 어렸을 때 딱 한 번, 엄마와 단 둘이 기차를 타고 산기슭에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댁에 간 여름을 기억한다. 언니들은 다 학교를 다니느라 바빴다. 그래서 언니들과 나이차가 있는 나만 엄마가 데리고 갔던 것 같다. 기차 안에서는 내내 졸고 역에 내려 또 택시를 한참 탔다. 입에 단내가 폴폴 풍길 때쯤 도착한 외할머니 댁 대청마루를 기억한다. 마당 앞의 펌프를 눌러대던 이모의 모습이 떠오르는 걸로 보아 수돗물은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전기는 들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밤이 되었을 때 마당은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화장실이 푸세식이어서도 무서웠지만 밤이 되면 보이질 않아 더 공포스러웠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작두 앞에 혼자 서 있던 누렁이 소, 거기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때 외할아버지가 끓이고 계시던 여물냄새, 외할아버지가 농사지으신다는 녹색빛이 가득 차 있던 논. 아, 더 어렸을 때 언니들도 같이 그 곳에서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니들과 모기장안에 쪼로록 누워있다. 봉숭아물을 들인 손 위에 검은 봉다리가 실로 묶여 있다. 언니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손을 꼬물락거릴 때마다 간헐적으로 봉다리 백색소음이 들린다.

*이상하게 거기에 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어떻게 돌아왔는지의 기억은 전혀 없다. 돌아오면서 이 아이처럼 엄마에게 ‘아름다운 여름이었어’라고 말해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세티만큼 엄마를 사랑하지 않은걸까? 나 말고 언니들이 셋이 더 있어서 이 모자가 보여주는 일상을 즐길 겨를이 없었을까? 하지만 난 이 엄마처럼, 아이가 하나다. 그런데 올 여름, 너무 더워 에어컨 밑에 숨어있느라 아이와 여름을 직면할 시간을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이었다. 그만큼 델핀 페레와 세티가 외할아버지댁에서 보낸 여름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여름을 보낸 그들도 지금쯤은 이 책을 보며 그 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세티가 시골로 향할 때 머리에 눌러쓰던 모자는 일종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라는 표식이었다. 여름을 거기서 보내는 동안, 세티는 할아버지네서 엄마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엿본다. (근데 말이 그렇지, 다락방에 있는 물건들을 보고, 서랍에 있는 물건들을 살펴보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엄마가 어렸을 때 그랬듯, 세티 역시 여러 곤충을 들여다보고 근처의 열매도 따먹는다. 그리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 신발끈을 묶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자신보다 어린 사촌, 조아킴에게 이 모자를 물려준다. 세티는 엄마가 컸던 곳에서의 여름을 똑같이 보내고 그 역시 성장한다. 여름은 햇빛으로 광합성 삼는 식물들이 커지는 계절이지만 우리 인간(!) 역시 그렇다. 여름이라는 아름다운 시간을 너무도 예쁘게 그린 책이다. (번역을 백수린 작가님이 하셔서 더 그럴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