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5구의 여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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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작가의 사상을 투영한 문장에서 지문처럼 묻은 작가의 개성을 느낄 수 있다. 개성있는 작품은 곧잘 문학성과 연결되고 주제문체를 중요하게 다루는 순수문학에서 자주 경험한다. 장르소설의 문장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체험이다. 순수문학 작가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표현력도 한몫하거니와  문체보다는 캐릭터사건에 집중하는 장르소설의 특성 탓이 크다.

 

그래도 가끔은 아! 하고 깜빡 잠에서 깨는 것처럼 10줄 이하의 단락만으로 특정 작가를 가리킬 경우가 있다. 나에게 레이먼드 챈들러와 데니스 루헤인 필립 클로델, 그리고 더글라스 케네디가 그렇다. 이들 작가가 쓴 작품은 문체보다는 내레이터(narrator/화자)의 목소리에서 개성을 느낄 수 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내레이터는 고독하고, 필립 클로델의 화자는 고뇌가 깊고, 데니스 루헤인의 내레이터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그으면 물방울이 주르르 흐를 것처럼 감정이 풍부하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파리 5구의 여인>읽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오늘 새벽까지 열 몇 시간을 달아서 읽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은 <빅피쳐>이후 두 번째인데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아하, 더글라스! 라는 감탄이 나왔다. 케네디 트유의 화자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케네디 소설에서는 다른 작가가 카피할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의 내레이터가 있다. 우유부단의 가정에서 자란 게 분명하 작품의 내레이터는 읽던 책을 확 집어던지고 싶을 만큼 소심하고 찌질하다. 만약 작품의 내레이터가 내 옆에 있다면 에라이, 이 인간아!’ 뒤통수 한 대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케네디가 창조한 이 찌질한 내레이터를 미워할 수만은 없다. 

 

 <빅피처>에서도 그랬지만 <파리5구의여인>에서도 주인공- <파리5구의여인>1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기에 주인공이 곧 내레이터가 된다-은 아내의 배신과 음모로 주인공은 마치 교통사고 현장의 피해자처럼 된다.  그러나 시체를 산자로 오해하여 총을 쏜 것처럼 사후적 결과이긴 해도, 주인공 역시 가정을 무너트리는데 일조하였기에 그는 붕괴된 가정과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며 깊은 죄책감에 빠진다. 하지만 주인공은 빨던 사탕을 떨어트린 코찔찔이처럼 징징거리며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무너진 가정을 다시 일으키려 분주히 움직인다. 이곳저곳에서 억울하게 얻어터져도 버틴다. 독자는 그런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띤다. 그를 응원한다. 왜? 소심한 주인공(내레이터)의 모습에서 독자는 거울을 보듯 바로 자신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글라스 케네디가 한심한 찌질이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또 내레이터로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대중소설이 추구하는 목적과  대중소설을 읽는 독자의 바람은 같은 무늬를 벽에 비춘다. 작품의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길 원치 않고 다만 주인공만큼나 찌질하고 새가슴인 독자의 가슴을 책 읽는 동안만이라도 부드럽게 만져주며 위로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위로는 반드시 독자가 포복절도하거나 대성통곡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도 없다. 독자를 울리고 약올리고 짜증을 일으키고 때로는 말도 안되는 오컬트적 환상을  불러와 경외감을 일으켜도 좋다.  그러나 다양한 감정의 파도를 일으키되 마무리는 독자가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파리5구의여인>의 결말은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해피엔딩이다. 해피엔딩은 대중소설의 모범적인 결과 방식이 아니라해도 압도적 다수의 독자는 그걸 원한다. 왜? 대중소설은 독자가 발 담그고 사는 세상을 모사하지만 그 세계의 끝은 소설처럼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모양을 그려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현실에 지치고 때로 벗어나길 갈망하다.  <파리5구의여인>은 독자에게 탈출구를 제공하고 안전한 복귀마저 돕는다.  그러므로 나는 장르소설 애호가로서 사심없이 말한다. <파리5구의여인>은 출판사가 매긴 작품 한 권의 돈값에 충분한 작품이라고. 

 

 도서관에서 남이 읽다가 대충 버린 책 말고 갓구은 빵냄새 나는 새 책으로 읽기 바란다. 농담 아니다. 출간한지 6개월 이내의 책에서는 분명히 빵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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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6
알베르 카뮈 지음, 이기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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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가 쓴 <레뜨항제>의 화자(‘나’)는 자궁과 무덤 사이에 선 위태로운 다자인(Dasein)이다.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근거를 확정하지 못하는 ‘나(뫼르소)’는 당연히 왜 사는지도 모른다. 그냥 거기에 이유 없이 던져진(피투) 인생이기에 목적 없이 자신을 미래로 던져가면서(기투)하면서 세계 속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생의 기원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각개의 인생이기에 때로 ‘나’는 세계 속의 타자가 의미한대로 날조된다. 


 하나의 사건은 이어 벌어진 사태에 원인이 되고 다음 사건에 목적이 된다고 믿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오늘 엄마가 죽었고 피곤한 ‘나’는 엄마의 시신을 안치한 관 앞에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때로 졸기도 한다. 사회 질서가 부여한 인위적 도덕 관념을 제거하면 열거한 사태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후 ‘나’가 누군가를 살해하고 법정에 서면 내가 마시고 피운 카페오레와 담배와 때때로 졸았던 행위는  ‘나’를 험하게 추궁하는 무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작품에서 공판검사는 '나'를 가리켜 “범죄자의 마음가짐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기소하는 바입니다(본 책 104쪽).”하고 말한다. 분명 '나'는 엄마의 장례 이후에 벌어진 아랍인 살해로 기소되었는데 검사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검사의 진술은 모순이다. 검사는 시간을 소급하여 사건의 인과관계를 역전하였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과 아랍인 살해는 시간상 순차적으로 발생한 별개의 사건이나 두 사건은 특정한 시간 속에 ‘나’라는 육신이 담겨 있고 거기에 특정한 질료(까페오레, 흡연, 코미디 영화관람, 연인과 섹스)를 덧붙임으로서 검사는 ‘나’에게 묻는 유책성의 근거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지옥(사르트르의 '타자')이 확립한 질서를 준거로 과거에 ‘나’가 행한 각개의 사태를 재단하고 죄를 붙인 것이다. 이렇게 세계 속에 머물고 있는 '나'는 지옥들이 합의한 질서에 갇힌다. 만약 그 질서를 불응하거나 위배하면 개인은 타자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즉자존재(의식없는 사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카뮈 작품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이휘영 선생과 카뮈 연구에 일생을 보낸 김화영 선생은 <레뜨항제L'Etranger>의 캐릭터이자 내레이터인  '나(뫼르소)'를 세계 내에서 이유없이 겉도는 인간으로 보았다. 반면 최근에 번역한 이기언 씨는 '나'를 동일자(le meme) 앞에선 '타자(l'autre)'로 본 것 같다. 말하자면 푸코가 말한 '나에게서 배제된 나'의 존재다.

 

 카뮈의 전작을 읽은 문학애호가로서 의견을 덧붙이면 나는 이휘영 선생과 김화영 선생이 번역한 제목에 이의가  없는 것처럼 이기언 씨가 붙인 제목에도 긍정한다.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거울 앞에 섰을 때를 가정해보자고 말하겠다.

 

 우리는 거울 앞에서 선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동일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악수할 목적으로 손을 내밀면 그 즉시 신뢰는 깨진다. 당신이 거울 앞에서 오른 손을 내밀면 거울 속의 당신은 틀림없이 왼쪽 손을 내밀 것이다. 악수가 친밀함과 화해를 상징한다면 거울 앞에서 선 나와 거울 속의 나는 감정적으로 절대 섞일 수 없는 나의 반의식(프로이트의 무의식)이다. 바로 이기언 씨가 붙인 제목대로 이인이 되는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나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닌 그 누군가. 대관절 이 부조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걸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차분하게 본 뒤에 역자의 해설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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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지음, 한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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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네필

 독서광은 때로 작가가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세상 모든 작가는 과거에 독서광이란 명찰을 달고 살았다. 영화감독도 마찬가지다. 세상 모든 영화감독은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오직 영화 보는데 미쳐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보는 걸 사랑하지 않고 영화를 연출할 수 없다. 영화 없이는 하루도 못 살기 때문에 스크린 현장 속으로 자신을 밀어버린 인간이 바로 영화감독이다(예외는 있고, 서너명 알고 있지만 언급할 가치가 없으므로 다루지 않는다).  

 

 누벨바그의 태양이자 시조인 프랑수와 트뤼포를 이야기할 때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영화적 아이덴티티를 지명하는 건 어렵다. 그는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고 영화 제작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그는 오픈 스포츠카를 몰며 1950년대 파리 시내를 휘젓던(동시에 여자도!) 스타 영화평론가였고 그 이전엔 영화관과 시네마떼크 프랑세즈를 제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든 영화광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트뤼포를 흠모하는 영화애호가들은 그를 가리켜 '영화인과 영화애호가'를 함께 지칭하는 시네필(Cinephile)이라 불렀다.

 

 2. 누벨바그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직역하면 새로운 물결이다. ‘새로운 경향이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트뤼포, 에릭 로메로, 장 뤽 고다르, 알렝 레네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영화연출가들이다. 그러나 기표는 유사해도 트뤼포와 그외 감독들의 누벨바그는 기의에서 갈라진다. 트뤼포는 르네 끌레망 같은 선배 감독들의 불필요한 형식주의와 클리세(Cliche)적 연출스타일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누벨바그의 이름표를 달았다. 그러나 장 뤽 고다르, 알랭 레네등 소르본대학교 출신 감독들은 영화를 정치적 표현매체로 인식하고 필름에 자신의 의식세계를 투사하면서 누벨바그의 명찰을 달았다. 비록 같은 그룹에 속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소르본 출신의 먹물 누벨바그와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트뤼포의 누벨바그가 성격상 분기한다.

 

 특히 고다르는 트뤼포와 애증이 깊은데, 한때 이 둘은 절친했으나 영화 연출의 노선차이로 끝내 절교한다. 사실 고다르의 영화도 트뤼포의 작품 못잖게 훌륭하다일부 평론가들은 트뤼포보다 고다르를 한 수 위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에게 물으면 고다르는 트뤼포의 명성위에 서거나 압도할 수 없다. 그 까닭은 트뤼포가 누벨바그의 원조이기 때문이 아니고 고다르의 영화가 관객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릭 로메로, 알랭 레네등 고다르를 포함한 트뤼포외 누벨바그 감독 작품 중에서 내 마음에 스며든 영화는 오직 트뤼포 뿐이다. 특히 (나는 아무리 애써도)고다르의 영화를 내 몸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다르가 찍은 몽타주 쇼트와 점프 컷이 혁신적이고 유명해도 그건 영화평론가들에게나 의미 있지 나처럼 평범하게 영화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영화를 사이에 두고 감독과 관객이 서로소(relatively prime)이면 그 작품은 망한다. 그리고 작품이 관객의 몸속으로 상쾌하게 스며들지 못할 때 극장에서 유일한 볼거리는 출구로 빠져나가는 관객과 그 맞은편 화장실에서 꼬여드는 쇠파리(평론가/촌지 받고 감탄사나 끼적이는 일간지 문화담당기자)들 뿐이다.

 

 3.<400번의 구타> http://www.youtube.com/watch?v=I5hilXRG8Tc

 <400번의 구타>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느꼈던 감동과 충격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시작되었다. 윗부분만 겨우 보인 에펠탑의 중심으로 흑백의 빠리(Paris)는 물결처럼 흐른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카메라가 에펠탑이 주변으로 뱅뱅 돌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달아나려고 수 없이 시도하지만 운명의 사슬이 내 목을 움켜쥐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14살 소년이 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학교 폭력과 가정 불화를 피해 달아났지만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 그 넓은 바다는 갈 곳 없는 소년을 따뜻하게 껴안아줄 엄마의 품이 아니었다바다는 소년의 앞을 가로막는 장벽일 뿐이고 소년은 도망쳐 왔던 길로 다시 몸을 되돌린다. 관객이 소 목에 걸린 멍애처럼 결코 벗을 수없는 소년의 불우한 운명을 확인하는 그 순간 소년은 카메라를 정면에서 노려본다. 그리고 프리즈 프레임 FIN(팽/)!

 세상의 무관심에 절망하는 14세 소년 앙뜨완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익스트림 클로우즈 쇼트로 영화가 끝났을 때 세계 영화사는 깜짝 놀라며 고함 질렀다. 누벨바그가 나타났다!

 

 내가 <400번의 구타>를 보면서 울었던 이유는 영화 속의 앙뜨완과 유년의 내 일부가 유사한 사이즈로 포개졌기 때문이었다. 열 몇 살 때 나는 가정문제로 일주일간 가출했었다. 가출 첫날부터 이후 3일간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도시의 이곳저곳을 먼지바람에 휩쓸린 검은 비닐봉지처럼 떠돌았다. 아무도 나에게 손내밀지 않았다. 그누구도 내게 관심 주지 않았다. 나를 유령보듯 외면한 체 모두 제 갈 길만 찾아 걷는 사람과 아스팔트 위로 무심히 흐르는 자동차는 나와 무관한 세상이었다. 어린 그때 나는 이 무심한 세계에 극심한 두려움과 증오를 느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공포는 지금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았다. 내 심장 깊은 곳에 상흔으로 남아 때로는 악몽의 형태로 잠든 나를 덮친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부모에게 매를 맞고 유기되어 빠리 시내를 떠돌던 앙뜨완은 프랑수와 트리포 감독의 유년의 에피소드이고 14세 소년 앙트완을 연기한 장 피엘 레오는 트뤼포의 페르소나이면서 동시에 유년의 내 초상이기도 하였다.

 

 트뤼포의 전기작가는 <400번의 구타> 탄생과정을 이렇게 썼다.

그는....자신의 유년기 특정 시점을 다룬 <앙투완의 가출>을 손질하기로 결정했다. 밀통가의 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는 실수로 수제를 못해 벌을 받게 되자 수업에 빠졌다. 그의 핑계(“어미니가 돌아가셨어요.”)는 다음날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가 수업 주에 찾아와 그의 따귀를 심하게 때렸던 것이다. 6월 초에 트뤼포는 이 에피소드에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 라슈네와 함께 무단결석, 영화 관람, 장터에서 탔던 회전 놀이기구, 부모와의 생활모습, 클리시 광장에서 연인의 품에 안기던 어머니가 그를 발견하고 놀라던 일을 덧붙였다. 장인에게 보여준 뒤 자금을 얻기 위해 그는 이 기억에 몇몇 다른 아이디어를 연결해 시나리오 앞부분을 채웠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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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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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

 여기서 묻는 대상의 작가는 예술가를 뜻하고, 글쓰기는 문학행위를 가리킨다. 물론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를 좋아하는(혹은 소비하는) 독자 일뿐이다. 그러나 추론할 수는 있다.

 동기는 다양할 것이다. 발자크처럼 돈을 벌고 여자를 꾀기 위해서, 미시마 유키오처럼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상에 이름을 팔기 위해서 일 수도 있다(미시마는 극우주의자이지만 문학가로서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러나 작가의식을 통과한 이후라면 글 쓰는 목적은 갓등아래 불빛처럼 하나로 모인다작가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재현하지 않고 세계를 창조한다.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부수고 다시 세운다. 그러기에 작가는 시대의 서기로서 그가 살아온 시간을 후대에 증언하고 끊임없이 당대와 다퉈며 불화에 시달리는 것이다. 소설이 단지 소비되는 상품에 머물지 않고 예술(문학)이 될 수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제 138회 나오키상 수상작 <내 남자>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 있는 소설이었다. 독특한 플롯과 서사를 표현한 이 작품은  친부녀간의 근친상간을 소재로 다루었다. 15살 나이차 나는 준고와 하나는 형식상 수양부녀(收養父女)관계지만 비혼남인 (‘미혼깜둥이처럼 차별어 이므로 쓰지 말자!) 준코가 27살에 자연재해로 가족을 잃은 하나를 입양한다. 그러나 준코와 하나는 일반적 가족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서로 육체를 탐한다.

 여기서 나는 짝을 이루는 관계를 가리키는 뜻에서 서로라는 표현을 썼다. 과연 12살 여자아이가 15년 연상의 사내를 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육신을 허락할 정신적 능력이 있을까? 물론 현행법이라면 그 관계를 위법으로 본다. 위력에 의한 성추행으로 처벌할 것이다.

 

 <내 남자>를 읽어나가면, 12살의 하나가 성장할수록 15살 연상의 준고를 아버지보다 연인에 더 큰 무게를 둔다. 동기는 가족 전부를 상실한 하나가 준고외에는 의지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준코는 외풍을 막아줄 유일한 방파제가 되고, 준고의 의지에 종속되는 걸 저항없이 수용한다. 그렇다면 독자는 준고를 소아성애자로 간주하고 마음 놓고 비난할 수 있을까?

 작가는 준고와 하나의 관계를 친족으로 설정하고 그 정보를 독자에게 노출한다. 준고가 15살 때 이웃 지방에서 하숙하다가 집주인 유부녀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준고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모른 체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하숙집 유부녀가 낳은 여자아이가 바로 하나다준고와 하나가 친부녀관계로 암시되면서 준고에게는 지저분한 성범죄자(소아성애자)의 이미지가 탈색된다. 그보다는 강한 느낌의 다른 이유가 있다. 왜 준고는 12세 여아의 육체를 집착하고, 준고는 단 한번도 저항하지 않는걸까? 독자마다 판단이 다르겠으나 작가는 그 이유를 소설의 곳곳에 묻어 두었다(그게 무엇인지 당신이 이 작품을 사서 읽으면된다!).

 

 <내 남자>가 나오키상 기수상작과 다른 점이라면 독특한 스타일이다. 우선 플롯에서 서사가 역순한다소설의 끝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박하사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의 또다른 특징은 각 챕터마다 내레이터(narrator)를 바꾼다는 점이다. 준고의 목소리로하나의 목소리로, 준고와 몸을 섞는 애인의 목소리로 매번 바뀌는 서사의 목소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이후 많은 작가들이 시도해 온 표현형식이다. 다만 서사 방식이 <라쇼몽>에 근원을 두고 있더라도, <내남자>는 내레이터 각개의 시점에서 따라 진실이 변하지 않는다. <내 남자>에서 내레이터는 그들이 본 풍경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해석도 독자에게 맞긴다. 바로 이런 점이 고전에서 스타일을 차용했어도 이 작품만의 보유한 특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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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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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나긴 이별>을 몇 번 읽어도 나는 늘 새로운 기분에 젖는다. 챈들러의 문학성이 뛰어나거나 내 머리가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세 번째 읽고 난 뒤에도 두 번째와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기분은 머물지 않았다. 앞서서 못 보았던 새로운 세상을 나는 읽었다. 아마도 이런 느낌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12번이나 읽게 된지도 모르겠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독서 후에는 나는 항상 머릿속이 젖는다. 감정이 뇌에서 흐르는지 심장에서 자라는지 모르겠으나 책장을 덮고 나면 나는 항상 감동에 젖어 있었다. 저녁 먹은 후 천천히 바다 속을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나는 비 오는 공항 활주로에 서 있다.

 

사람만 세월 타지 않는다. 문학 작품 속의 캐릭터도 늙는다. 1936년에 발표한 <빅슬립>에서 서른셋이었던 탐정 필립 말로는 <안녕 내 사람> <하이윈도>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를 거치면서 조금씩 나이를 먹었다예수가 죽은 나이에서 출발한 필립 말로 시리즈가 <기나긴 이별>에 왔을 때는 젊은 탐정의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 졌다. 여전히 비혼 상태로 동네 모퉁이 바에 앉아 사건을 기다리며 김릿을 마신다해도 서른셋과 오십 줄의 필립 말로는 같은 사내가 아니다시리즈에서 필립 말로가 덮어쓴 세월은 챈들러 문학성의 더께와 깊이의 차이를 노정한다. 그러므로 <긴나긴 이별>은 챈들러 문학의 조종이지만 매니아의 가슴속에는 십자가속의 예수처럼 박힌 별이다. 

 

 내가 처음 테리 레녹스를 보았을 때, 그는 취해서 더 댄서스의 테라스 바깥에 서워 놓은 롤스로이스 실버레이스 안에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문장은 저렇게 끝났다. 

 

 “안녕히

 그는 몸을 돌려 방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인조 대리석 복도를 따라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챈들러와 더불어 우리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말할 때 데밋 해실을 함께 논한다. 원조는 데밋 해실이다원조는 이후’ 세계의 말씀이고 빛이다. 그러나 이후가 원조를 육박하여 외려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 챈들러의 작품에서 배회하는 데밋 해실의 유령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챈들러의 작품에 문학성을 입혔다. 장르 작가에게는 거의 유일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필립 말로 시리즈 첫 작품인 <빅슬립>이 영화로 제작될 때 감독(하워드 혹스)은 각색자에게 다른 건 다 필요 없고원작을 충실히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이 각색자가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 대 문호 월리엄 포크너다.

 하지만 이런 신화적 여담에도 챈들러의 작품은 코카콜라와 같다. 대중은 사소한 갈증에 에비앙 생수보다는 콜라를 더 많이 찾는다윌리엄 포크너도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헐리우드 스크랩터로 지냈으나 그의 작품(<음향과 분노><8월의 빛>등등)은 필립 말로 시리즈가 다가서지 못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챈들러의 작품을 읽을 때 책 커버에 박힌 평자들의 현란한 수사에 현혹되어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장르소설의 좋은 점은 그런 것이다사귄지 반년쯤 된 연인과 동네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며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처럼 편하다독자는 코트 깃 세운 말로의 터프하면서도 잰틀한 액션과 대사에서 1950년대의 미국 샌프란스시코 거리의 냄새를 맡는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찌든 햇살을 본다. <기나긴 이별>은 그렇게 온몸으로 읽어나가는 소설이다.

 

 나는 2009년에 6권 전집을 구매해서 <호수의 여인><리틀리스터>를 제외하고 전부 두 번 이상 읽었다. 특히 <기나긴 이별>은 지금까지 4번 읽었다(‘동서미스터리북스' 의  이경식 씨가 번역한 것까지 더하면 총 5번이다). 그리고 앞으로 10번 더 읽을 예정이다. 이유는 있다. 이 작품 만큼은 무라카미 하루키 보다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읽고 싶다. 하지만 그런 사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는 떠나, 이 작품은 스무 번 읽어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멋있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무라카미 하루키가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에서 받은 영향을 매우 크다. 하루키의 출세작 <노르웨이의 숲(상실의시대)>에 문체로 녹아있다<빅슬립><기나긴 이별>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번개 맞은 것처럼 생각했다. ? 왜 여기에 하루키가 있는거지? 처음 몇 초간 챈들러가 하루키 문체를 모방한 것으로 착각했다. 닮은 건 문체뿐이 아니다. 소설 제목(<노르웨이의 숲>)과 작품의 중심테마인 숲의 이미지를 <기나긴 이별> 의 에피소드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출간후 하루키는 인터뷰에서 작품 제목<노르웨이의 숲(노르웨이노 모리)>을 비틀즈의 곡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에서차용했다고 한다. 이 곡은 비틀즈가 65년 10월에 레코딩한 앨범 Rubber Sou에 수록한 곡이다. 번역하면 <노르웨이산 가구(새는 날았다)>가 된다. 제목이 암시하는 내용이 사실 작품의 중심테마란 것을 가리기 위해 하루키가 본심을 감춘 거의 유일한 경우라고 본다.

  

 하루키는 <노르웨이 숲> 초반부에 에피소드 형식으로 숲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반복 제시한다. 그런데 작가가 그려낸 숲의 이미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독자에게 기묘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숲의 실체는 작품 후반에 드러난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은 여인 두명이 등장한다.  고교 친구의 애인 나오코과 대학선배 애인 하츠미다. 둘 다 자살한다. 나오코는 유년시절 부터 사랑했던 연인이 어느날 갑자기 자가용에서 자살해 버렸다는 이유로 삶의 중심에서 이탈한다. 하츠미는 대학시절에 사귀어 왔던 남자에게서 버림 받은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결국 껍질 뿐인 자신을 껴안고 미래를 그려낼 자신을 찾지 못해 자살한다. 특히 나오코의 자살은 와타나베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데, 그녀는 숲에서 목을 맨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표현된 이 불길한 숲의 이미지는 하루키의 독창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고백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기나긴 이별> 후반부에 이런 에피소드가 대사로 표현된다. 

 

 “그 사람은 노르웨이의 눈 속에서 젊은 날 죽었어야 했어요. 내가 죽음에 내준 내 연인으로서요. 그는 도박꾼들의 친구로, 부유한 창녀의 남편으로 망가지고 타락한 남자가 되어 돌아왔어요. 시간이 모든 것을 저열하고 초라하고 구질구질하게 만들었죠. 하워드, 인생의 비극은 아름다운 것들이 젊어서 죽는다는 데 있지 않아요. 다만 아름다운 것들이 늙고 추잡해지는데 있는 것이죠. (<기나긴 이별> pp 544-545)”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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