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나긴 이별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기나긴 이별>을 몇 번 읽어도 나는 늘 새로운 기분에 젖는다. 챈들러의 문학성이 뛰어나거나 내 머리가 나쁘거나 둘 중 하나다. 세 번째 읽고 난 뒤에도 두 번째와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은 기분은 머물지 않았다. 앞서서 못 보았던 새로운 세상을 나는 읽었다. 아마도 이런 느낌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12번이나 읽게 된지도 모르겠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독서 후에는 나는 항상 머릿속이 젖는다. 감정이 뇌에서 흐르는지 심장에서 자라는지 모르겠으나 책장을 덮고 나면 나는 항상 감동에 젖어 있었다. 저녁 먹은 후 천천히 바다 속을 유영하는 돌고래처럼 나는 비 오는 공항 활주로에 서 있다.
사람만 세월 타지 않는다. 문학 작품 속의 캐릭터도 늙는다. 1936년에 발표한 <빅슬립>에서 서른셋이었던 탐정 필립 말로는 <안녕 내 사람> <하이윈도> <호수의 여인> <리틀 시스터>를 거치면서 조금씩 나이를 먹었다. 예수가 죽은 나이에서 출발한 필립 말로 시리즈가 <기나긴 이별>에 왔을 때는 젊은 탐정의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해 졌다. 여전히 비혼 상태로 동네 모퉁이 바에 앉아 사건을 기다리며 김릿을 마신다해도 서른셋과 오십 줄의 필립 말로는 같은 사내가 아니다. 시리즈에서 필립 말로가 덮어쓴 세월은 챈들러 문학성의 더께와 깊이의 차이를 노정한다. 그러므로 <긴나긴 이별>은 챈들러 문학의 조종이지만 매니아의 가슴속에는 십자가속의 예수처럼 박힌 별이다.
내가 처음 테리 레녹스를 보았을 때, 그는 취해서 더 댄서스의 테라스 바깥에 서워 놓은 롤스로이스 실버레이스 안에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문장은 저렇게 끝났다.
“안녕히”
그는 몸을 돌려 방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인조 대리석 복도를 따라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챈들러와 더불어 우리가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말할 때 데밋 해실을 함께 논한다. 원조는 데밋 해실이다. 원조는 ‘이후’ 세계의 말씀이고 빛이다. 그러나 이후가 원조를 육박하여 외려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 챈들러의 작품에서 배회하는 데밋 해실의 유령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챈들러의 작품에 문학성을 입혔다. 장르 작가에게는 거의 유일한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필립 말로 시리즈 첫 작품인 <빅슬립>이 영화로 제작될 때 감독(하워드 혹스)은 각색자에게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원작을 충실히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이 각색자가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 대 문호 월리엄 포크너다.
하지만 이런 신화적 여담에도 챈들러의 작품은 코카콜라와 같다. 대중은 사소한 갈증에 에비앙 생수보다는 콜라를 더 많이 찾는다. 윌리엄 포크너도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헐리우드 스크랩터로 지냈으나 그의 작품(<음향과 분노>와 <8월의 빛>등등)은 필립 말로 시리즈가 다가서지 못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챈들러의 작품을 읽을 때 책 커버에 박힌 평자들의 현란한 수사에 현혹되어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장르소설의 좋은 점은 그런 것이다. 사귄지 반년쯤 된 연인과 동네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며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처럼 편하다. 독자는 코트 깃 세운 말로의 터프하면서도 잰틀한 액션과 대사에서 1950년대의 미국 샌프란스시코 거리의 냄새를 맡는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찌든 햇살을 본다. <기나긴 이별>은 그렇게 온몸으로 읽어나가는 소설이다.
나는 2009년에 6권 전집을 구매해서 <호수의 여인>과 <리틀리스터>를 제외하고 전부 두 번 이상 읽었다. 특히 <기나긴 이별>은 지금까지 4번 읽었다(‘동서미스터리북스' 의 이경식 씨가 번역한 것까지 더하면 총 5번이다). 그리고 앞으로 10번 더 읽을 예정이다. 이유는 있다. 이 작품 만큼은 무라카미 하루키 보다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읽고 싶다. 하지만 그런 사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는 떠나, 이 작품은 스무 번 읽어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멋있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무라카미 하루키가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에서 받은 영향을 매우 크다. 하루키의 출세작 <노르웨이의 숲(상실의시대)>에 문체로 녹아있다. <빅슬립>과 <기나긴 이별>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번개 맞은 것처럼 생각했다. 어? 왜 여기에 하루키가 있는거지? 처음 몇 초간 챈들러가 하루키 문체를 모방한 것으로 착각했다. 닮은 건 문체뿐이 아니다. 소설 제목(<노르웨이의 숲>)과 작품의 중심테마인 숲의 이미지를 <기나긴 이별> 의 에피소드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출간후 하루키는 인터뷰에서 작품 제목<노르웨이의 숲(노르웨이노 모리)>을 비틀즈의 곡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에서차용했다고 한다. 이 곡은 비틀즈가 65년 10월에 레코딩한 앨범 Rubber Sou에 수록한 곡이다. 번역하면 <노르웨이산 가구(새는 날았다)>가 된다. 제목이 암시하는 내용이 사실 작품의 중심테마란 것을 가리기 위해 하루키가 본심을 감춘 거의 유일한 경우라고 본다.
하루키는 <노르웨이 숲> 초반부에 에피소드 형식으로 숲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반복 제시한다. 그런데 작가가 그려낸 숲의 이미지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독자에게 기묘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숲의 실체는 작품 후반에 드러난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은 여인 두명이 등장한다. 고교 친구의 애인 나오코과 대학선배 애인 하츠미다. 둘 다 자살한다. 나오코는 유년시절 부터 사랑했던 연인이 어느날 갑자기 자가용에서 자살해 버렸다는 이유로 삶의 중심에서 이탈한다. 하츠미는 대학시절에 사귀어 왔던 남자에게서 버림 받은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결국 껍질 뿐인 자신을 껴안고 미래를 그려낼 자신을 찾지 못해 자살한다. 특히 나오코의 자살은 와타나베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데, 그녀는 숲에서 목을 맨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표현된 이 불길한 숲의 이미지는 하루키의 독창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고백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 <기나긴 이별> 후반부에 이런 에피소드가 대사로 표현된다.
“그 사람은 노르웨이의 눈 속에서 젊은 날 죽었어야 했어요. 내가 죽음에 내준 내 연인으로서요. 그는 도박꾼들의 친구로, 부유한 창녀의 남편으로 망가지고 타락한 남자가 되어 돌아왔어요. 시간이 모든 것을 저열하고 초라하고 구질구질하게 만들었죠. 하워드, 인생의 비극은 아름다운 것들이 젊어서 죽는다는 데 있지 않아요. 다만 아름다운 것들이 늙고 추잡해지는데 있는 것이죠. (<기나긴 이별> pp 544-545)”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로 이 대목에서 ‘숲’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