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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평점 :
작가가 글을 쓰는 동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
여기서 묻는 대상의 작가는 예술가를 뜻하고, 글쓰기는 문학행위를 가리킨다. 물론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 이야기를 좋아하는(혹은 소비하는) 독자 일뿐이다. 그러나 추론할 수는 있다.
동기는 다양할 것이다. 발자크처럼 돈을 벌고 여자를 꾀기 위해서, 미시마 유키오처럼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상에 이름을 팔기 위해서 일 수도 있다(미시마는 극우주의자이지만 문학가로서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러나 ‘작가의식’을 통과한 이후라면 글 쓰는 목적은 갓등아래 불빛처럼 하나로 모인다. 작가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재현하지 않고 세계를 창조한다.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부수고 다시 세운다. 그러기에 작가는 시대의 서기로서 그가 살아온 시간을 후대에 증언하고 끊임없이 당대와 다퉈며 불화에 시달리는 것이다. 소설이 단지 소비되는 상품에 머물지 않고 예술(문학)이 될 수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제 138회 나오키상 수상작 <내 남자>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 있는 소설이었다. 독특한 플롯과 서사를 표현한 이 작품은 친부녀간의 근친상간을 소재로 다루었다. 15살 나이차 나는 준고와 하나는 형식상 수양부녀(收養父女)관계지만 비혼남인 (‘미혼’은 ‘깜둥이’처럼 차별어 이므로 쓰지 말자!) 준코가 27살에 자연재해로 가족을 잃은 하나를 입양한다. 그러나 준코와 하나는 일반적 가족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서로 육체를 탐한다.
여기서 나는 ‘짝을 이루는 관계’를 가리키는 뜻에서 ‘서로’라는 표현을 썼다. 과연 12살 여자아이가 15년 연상의 사내를 ‘짝’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육신을 허락할 정신적 능력이 있을까? 물론 현행법이라면 그 관계를 위법으로 본다. 위력에 의한 성추행으로 처벌할 것이다.
<내 남자>를 읽어나가면, 12살의 하나가 성장할수록 15살 연상의 준고를 아버지보다 연인에 더 큰 무게를 둔다. 동기는 가족 전부를 상실한 하나가 준고외에는 의지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준코는 외풍을 막아줄 유일한 방파제가 되고, 준고의 의지에 종속되는 걸 저항없이 수용한다. 그렇다면 독자는 준고를 소아성애자로 간주하고 마음 놓고 비난할 수 있을까?
작가는 준고와 하나의 관계를 친족으로 설정하고 그 정보를 독자에게 노출한다. 준고가 15살 때 이웃 지방에서 하숙하다가 집주인 유부녀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준고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모른 체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하숙집 유부녀가 낳은 여자아이가 바로 하나다. 준고와 하나가 친부녀관계로 암시되면서 준고에게는 지저분한 성범죄자(소아성애자)의 이미지가 탈색된다. 그보다는 강한 느낌의 다른 이유가 있다. 왜 준고는 12세 여아의 육체를 집착하고, 준고는 단 한번도 저항하지 않는걸까? 독자마다 판단이 다르겠으나 작가는 그 이유를 소설의 곳곳에 묻어 두었다(그게 무엇인지 당신이 이 작품을 사서 읽으면된다!).
<내 남자>가 나오키상 기수상작과 다른 점이라면 독특한 스타일이다. 우선 플롯에서 서사가 역순한다. 소설의 끝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박하사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의 또다른 특징은 각 챕터마다 내레이터(narrator)를 바꾼다는 점이다. 준고의 목소리로, 하나의 목소리로, 준고와 몸을 섞는 애인의 목소리로 매번 바뀌는 서사의 목소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이후 많은 작가들이 시도해 온 표현형식이다. 다만 서사 방식이 <라쇼몽>에 근원을 두고 있더라도, <내남자>는 내레이터 각개의 시점에서 따라 진실이 변하지 않는다. <내 남자>에서 내레이터는 그들이 본 풍경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해석도 독자에게 맞긴다. 바로 이런 점이 고전에서 스타일을 차용했어도 이 작품만의 보유한 특장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