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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ㅣ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지음, 한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시네필
독서광은 때로 작가가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세상 모든 작가는 과거에 독서광이란 명찰을 달고 살았다. 영화감독도 마찬가지다. 세상 모든 영화감독은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오직 영화 보는데 미쳐 지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보는 걸 사랑하지 않고 영화를 연출할 수 없다. 영화 없이는 하루도 못 살기 때문에 스크린 현장 속으로 자신을 밀어버린 인간이 바로 영화감독이다(예외는 있고, 서너명 알고 있지만 언급할 가치가 없으므로 다루지 않는다).
누벨바그의 태양이자 시조인 프랑수와 트뤼포를 이야기할 때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그의 영화적 아이덴티티를 지명하는 건 어렵다. 그는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고 영화 제작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그는 오픈 스포츠카를 몰며 1950년대 파리 시내를 휘젓던(동시에 여자도!) 스타 영화평론가였고 그 이전엔 영화관과 ‘시네마떼크 프랑세즈’를 제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든 영화광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트뤼포를 흠모하는 영화애호가들은 그를 가리켜 '영화인과 영화애호가'를 함께 지칭하는 시네필(Cinephile)이라 불렀다. .
2. 누벨바그
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직역하면 ‘새로운 물결’이다. ‘새로운 경향’이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트뤼포, 에릭 로메로, 장 뤽 고다르, 알렝 레네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영화연출가들이다. 그러나 기표는 유사해도 트뤼포와 그외 감독들의 누벨바그는 기의에서 갈라진다. 트뤼포는 르네 끌레망 같은 선배 감독들의 불필요한 형식주의와 클리세(Cliche)적 연출스타일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누벨바그의 이름표를 달았다. 그러나 장 뤽 고다르, 알랭 레네등 소르본대학교 출신 감독들은 영화를 정치적 표현매체로 인식하고 필름에 자신의 의식세계를 투사하면서 누벨바그의 명찰을 달았다. 비록 같은 그룹에 속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소르본 출신의 먹물 누벨바그와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트뤼포의 누벨바그가 성격상 분기한다.
특히 고다르는 트뤼포와 애증이 깊은데, 한때 이 둘은 절친했으나 영화 연출의 노선차이로 끝내 절교한다. 사실 고다르의 영화도 트뤼포의 작품 못잖게 훌륭하다. 일부 평론가들은 트뤼포보다 고다르를 한 수 위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객에게 물으면 고다르는 트뤼포의 명성위에 서거나 압도할 수 없다. 그 까닭은 트뤼포가 누벨바그의 원조이기 때문이 아니고 고다르의 영화가 관객의 마음에 파고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릭 로메로, 알랭 레네등 고다르를 포함한 트뤼포외 누벨바그 감독 작품 중에서 내 마음에 스며든 영화는 오직 트뤼포 뿐이다. 특히 (나는 아무리 애써도)고다르의 영화를 내 몸 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다르가 찍은 몽타주 쇼트와 점프 컷이 혁신적이고 유명해도 그건 영화평론가들에게나 의미 있지 나처럼 평범하게 영화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영화를 사이에 두고 감독과 관객이 서로소(relatively prime)이면 그 작품은 망한다. 그리고 작품이 관객의 몸속으로 상쾌하게 스며들지 못할 때 극장에서 유일한 볼거리는 출구로 빠져나가는 관객과 그 맞은편 화장실에서 꼬여드는 쇠파리(평론가/촌지 받고 감탄사나 끼적이는 일간지 문화담당기자)들 뿐이다.
3.<400번의 구타> http://www.youtube.com/watch?v=I5hilXRG8Tc
<400번의 구타>를 처음 봤을 때 내가 느꼈던 감동과 충격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시작되었다. 윗부분만 겨우 보인 에펠탑의 중심으로 흑백의 빠리(Paris)는 물결처럼 흐른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나는, 카메라가 에펠탑이 주변으로 뱅뱅 돌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달아나려고 수 없이 시도하지만 운명의 사슬이 내 목을 움켜쥐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14살 소년이 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는 울고 있었다. 학교 폭력과 가정 불화를 피해 달아났지만 소년의 눈앞에 펼쳐진 그 넓은 바다는 갈 곳 없는 소년을 따뜻하게 껴안아줄 엄마의 품이 아니었다. 바다는 소년의 앞을 가로막는 장벽일 뿐이고 소년은 도망쳐 왔던 길로 다시 몸을 되돌린다. 관객이 소 목에 걸린 멍애처럼 결코 벗을 수없는 소년의 불우한 운명을 확인하는 그 순간 소년은 카메라를 정면에서 노려본다. 그리고 프리즈 프레임. FIN(팽/끝)!
세상의 무관심에 절망하는 14세 소년 앙뜨완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익스트림 클로우즈 쇼트로 영화가 끝났을 때 세계 영화사는 깜짝 놀라며 고함 질렀다. 누벨바그가 나타났다!
내가 <400번의 구타>를 보면서 울었던 이유는 영화 속의 앙뜨완과 유년의 내 일부가 유사한 사이즈로 포개졌기 때문이었다. 열 몇 살 때 나는 가정문제로 일주일간 가출했었다. 가출 첫날부터 이후 3일간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도시의 이곳저곳을 먼지바람에 휩쓸린 검은 비닐봉지처럼 떠돌았다. 아무도 나에게 손내밀지 않았다. 그누구도 내게 관심 주지 않았다. 나를 유령보듯 외면한 체 모두 제 갈 길만 찾아 걷는 사람과 아스팔트 위로 무심히 흐르는 자동차는 나와 무관한 세상이었다. 어린 그때 나는 이 무심한 세계에 극심한 두려움과 증오를 느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공포는 지금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았다. 내 심장 깊은 곳에 상흔으로 남아 때로는 악몽의 형태로 잠든 나를 덮친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부모에게 매를 맞고 유기되어 빠리 시내를 떠돌던 앙뜨완은 프랑수와 트리포 감독의 유년의 에피소드이고 14세 소년 앙트완을 연기한 장 피엘 레오는 트뤼포의 페르소나이면서 동시에 유년의 내 초상이기도 하였다.
트뤼포의 전기작가는 <400번의 구타> 탄생과정을 이렇게 썼다.
“그는....자신의 유년기 특정 시점을 다룬 <앙투완의 가출>을 손질하기로 결정했다. 밀통가의 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는 실수로 수제를 못해 벌을 받게 되자 수업에 빠졌다. 그의 핑계(“어미니가 돌아가셨어요.”)는 다음날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가 수업 주에 찾아와 그의 따귀를 심하게 때렸던 것이다. 6월 초에 트뤼포는 이 에피소드에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 라슈네와 함께 무단결석, 영화 관람, 장터에서 탔던 회전 놀이기구, 부모와의 생활모습, 클리시 광장에서 연인의 품에 안기던 어머니가 그를 발견하고 놀라던 일을 덧붙였다. 장인에게 보여준 뒤 자금을 얻기 위해 그는 이 기억에 몇몇 다른 아이디어를 연결해 시나리오 앞부분을 채웠다.’ -<트뤼포-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