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대단하다. 단순한 인물 사진이 아니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스타일로 살고 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존중하는 눈으로 `타인의 취향`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욕구에 적절히 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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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을 위해 '취침용'으로 썼어요. 잠 안 올 때 읽어 보아요. ^^

 

요즘 오프라인 언론과 SNS에서는 원세훈 전 국장원장를 상대로 한 검찰의 수사와 기소방식을 놓고 이슈가 만발이다. 토픽의 형태는 기소내용과 수사방식을 놓고 독립기관인 검찰과 행정부에 속한 법무부 장관과 거래를 한다는 것이다.

 

현재 검찰이 원세훈에게 적용한 혐의는 크게는 두 가지다. 공직자 선거법 위반, 재직 중 독직사건(개인비리) 그리고 국정원법 위반도 추가될 거라고 한다. 검찰총장(채동욱)은 원세훈을 선거법 위반을 적용, ‘구속수사하기를 원하고 법무부장관(황교안)구속만큼은 안 된다며 버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은 원세훈을 공직자 선거법 위반으로 수사하지만 구속수사 하지는 않는다 로 타협을 본 듯하다.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이 원세훈을 부딪치는 상황에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수사의 원칙이다. 이제까지 검찰은 수사 단계에서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해왔다. 피의자를 검찰의 영향이 미치는 공간에 인치하고 나서 피의자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손쉽게 모았다. 그러고 나서 그 데이타를 바탕으로 공소(기소)를 해왔다. 이런 형태의 수사를 강제수사라고 한다.

 

검찰이 수사하고 공소(기소)를 하고, 영장을 청구하는 건 법률(각각 형소법195/형소법246/헌법123)에 규정되어 있다. 수사의 시작은 고소와 고발 외에 수사기관의 범죄 인지에 따른다. 우리나라 법은 수사기관이 수사를 개시할 때 임의수사를 원칙으로 하도록 한다. 임의수사란 수사기관(검찰/사법경찰관리) 용의자나 피의자의 동의(임의동행, 승낙수색, 승낙검증,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얻어 수사를 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입장에서 보면, 임의수사만으로 그들이 원하는 수사의 목적(“실체적 진실 발견”)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수사기관은 보다 쉬운 방법을 선택하는데 그게 바로 피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실행하는 수사인 강제수사로 방법을 바꾼다. 강제수사의 조건은 법률(형소법 1991)로 정해져 있고 대인적 강제(체포, 구속, 소환) 대물적 강제(압수 수색, 제출명령, 수사상 검증)로 나눈다.

 

법률이 강제수사를 인정하고 있다고 해서 수사기관이 제멋대로 대인과 대물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영장이 있어야 한다. 영장은 법원에서 판사가 발부한다. 검사는 피의자를 구속할 목적으로 법원에 영장을 요청하기 전에 구속 사유를 확정해야 한다.

형사소송법 제702항이 피의자 구속 영장 청구의 사례로 세 가지(피의자의 주거 불안정, 증거인멸의 우려, 도망하거나 도망할 우려)로 규정했다. 검사는 이 셋 중 어느 하나 까닭으로 혹은 셋 모두에 포함된다고 이유로 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한다. 검사의 영장 청구권은 우리나라 헌법 제 123항의 적시해 놓았다. 영장은 요청과 발부가 기계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고 판사가 심사를 해서 검사의 요청이 일리 있다고 판단해야 비로소 발부가 된다. 만약에 요청의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판사는 검사의 영창 청구를 물리치게 되는 데 이것을 기각이라고 한다.

 

검찰은 주진우 기자에게 명예훼손죄허위사실공표죄혐의를 두고 그 사실을 입증(실체적 진실 발견)하기 위해 피의자 구속이라는 강제수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구속 영장의 청구 이유로 증거인멸을 들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것은, 수사기관의 구속영장청구와 발사의 영발발부 만으로 유죄가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죄의 결정은 검사가 수사를 한 수 공소를 하고, 공판이 개시되고, 검사와 피고인이 서로 상대방이 되어 법정 다툼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판사는 법정 다툼을 진행한 뒤 최종에 이르러 판결로서 유죄결정(혹은 무죄)을 내린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는 피의자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는 사실을 나온다.

그러므로 검찰이 주진우 기자를 상대로 법원에 구속영장을 신청한 후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든 기각을 하던 주진우 기자의 신분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즉 피의자의 구속여부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려는 수사기관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구속된 그 상태가 피의자(주진우)의 유죄냐 무죄냐를 가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우리는 이 공식을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검사는 형소법 702항에 따라서 원세훈에게 적용할 구속영장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 이때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도 있고, 물리칠 수(기각)도 있다. 하지만 영장이 발부되거나 기각되거나 길항하는 어느 하나의 결정은 수사기관의 수사를 막지 못한다. 지금도 주진우 기자는 수사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원세훈이 불구속된다 해도 수사가 멈추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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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이방인>은 매력이 풍부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 편재한 햇살의 느낌은 우울할 때마다 어서 이 작품을 펼쳐 읽으라 유혹한다. 흐린 날에 읽더라도 이 작품을 펼치면 나는 거기에서 따뜻한 기운을 느낀다. 1940년대 알제의 풍경, 싱그러운 지중해의 여름, 남루한 서민 아파트, 허름한 레스토랑, 맨땅의 먼지와 소문마저 쓸고 가는 전차와 전차 속을 꽉 채운 남루한 옷차림의 알제리인들...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고즈넉한 이미지들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바로 그 <레트항제/이방인>가 금년에 또 출간되었다. 나는 샀다. 이로서 내방 서가에 '이방인'이 하나 더 늘었다. 번역자는 불문학자 김화영 선생이다. 따라서 이 판본은 김화영 선생의 이름이 박힌 책세상/민음사 판본의 번역 텍스트와 동일할 것이다.


 외형은 변했다. 판형이 사방으로 늘어졌다. 제목 앞에 일러스트라는 관형어가 붙었다. 텍스트에 그림을 입혔다는 말이다. 저자 카뮈의 이름 다음으로, 호세 무뇨스의 이름이 박혔다. 원작 제목 앞에 붙은 관형어와 저자 뒤에, 번역자 앞에 박힌 화가의 이름으로 이 작품은 텍스트에 준하는 의미가 있다는 뜻을 암시한다.

 

  작품을 몇 페이지 넘겼다. 담배를 꼬나문 중년사내가 내 시선에 날아와 박힌다. 사내의 표정은 어둡다. 호세 무뇨스는 세상의 독자들이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뫼르소란 캐릭터를 이렇게 표현했다. 호세가 그린 뫼르소의 그림에 내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들이댄다. 사내의 얼굴은 반항하는 제임스 딘을 코스프레한 젊은 시절의 작가와 닮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호세가 그린 뫼르소의 이미지는 릭 브레인을 판화로 찍어낸 것 같다.

  

         릭이라고? 무슨 릭?

 

 마이클 커티즈 감독이 1944년에 연출한 헐리웃 영화 <카사블랑카>, 싱글남 릭 브레인(험프리 보가트 역)이다. 그러고 보니, 본문 6페이지의 그림도 어쩐지 아랍스럽다 했다. 하지만 이방인의 공간 배경인 알제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 있고, 릭의 소유한 술집이 위치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에 있다. 모로코가 바라보는 바다는 대서양이다. 그러니까, 효세가 그린 그래픽노블을 보고 뫼르소가 알베르 카뮈를 닮았느니, 험프리 보가트를 닮았느니 하고 추측하는 건 하찮다. 중요한 건 그림이 아니라 텍스트다!

 

 내가 읽은 판본만 놓고 말하자면 국내에서 <이방인> 번역한 분은 단 세 사람뿐이다. 이휘영 선생(문예출판사)과 이기언(문학동네) 그리고 김화영(책세상/민음사)선생이다. <일러스트 이방인>이란 제목으로 책세상에서 출간한 이 판본의 역자도 김화영 선생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텍스트에 호세의 그림만 얹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택스트를 읽으니, 역자는 책세상/민음사 판본과 같으나, 내용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원문을 예로 들자. <이방인>의 프랑스어 원본 첫 문단은 이렇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ssile: <<Mere décédée. Enterrement demain. sentiments distingués.>> Cela ne veut rien dire. C’était peut-être hier.

   

  몇 개의 부사를 제외하면 모두 독립절로 구성된 아홉 개의 문장(이중에서 문장 세 개는 명사로 연결된 토막글이다)<알베르 카뮈 전집 특별판>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알베르 카뮈 전집 특별판> 책세상 2010 2, p446.

 

  이 번역이 <일러스트 이방인>에서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일러스트 이방인> 책세상 2013, p7

 

  미묘한 차이라서 바뀐 단어가 눈에 안 띨 지도 모르겠다우선 <알베르 카뮈 전집 특별판>에는 번역이 누락된 ‘je ne sais pas(주 느 사 빠/나는 모르겠다)’에 해당하는 문장이 <일러스트 이방인>에는 표현되었다. 그리고 sentiments distingués에 해당하는 표현이 경백에서 근조로 바뀌었다.

 

  법원이 재심사건을 심리할 때 법관(대법원 판사)들은 기존의 판결을 배척하는 (새로운)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법원 조직이 매우 보수적인 헌법기관이란 점도 작용하지만 수 십 년 전에 내린 선배법관(조상님 같은 법관)이 결정한 판결을 후배법관(손자뻘 되는)이 깨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례는 쉽게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작년 인혁당 재심사건의 새로운 판결은 우리사회에 매우 중한 파장을 던진 것이다).

 

  단순히 출판사가 위탁한 번역자가 아니라, 학계에 몸담은 학자가 번역한 문장도 그런 모양이다. 올해 일흔 셋인 김화영 선생은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알베르 카뮈 연구자다. 이런 김화영 선생이 원문에 있으나 번역본엔 빠진 je ne sais pas에 해당하는 표현을 이제야 채워 넣고 sentiments distingués경백에서 근조로 표현을 바꾼 것은, 김화영 선생이 <이방인>을 처음 번역한 이후 금시 뿐이.

 

   경백근조로 바꾼다고 의미가 달라질까? 누락된 문장은 채워야 하는 게 번역자의 당연한 책무가 아닐까? 대관절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김화영 선생은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까? 내가 아는 한 sentiments distingués경백으로 처음 번역한 분은 이휘영 선생이다. 이휘영 선생은 국내 최초로 <불한사전>을 편찬한 우리나라 1세대 불문학자이고 <이방인>을 국내(와 아시아) 최초로 번역한 분이다. 이휘영 선생이 번역한 <이방인>의 첫 문단을 보자.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휘영 <이방인> 문예출판사 p9

 

  이로써 우리는 김화영 선생의 <이방인> 번역이 어디에 근거를 두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김화영 선생은 아마도 이휘영 선생의 카리스마(동양 최초 번역이라는)에 눌렸거나, 선배 학자의 번역 스타일을 깨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김화영 선생을 존경하는 하면서도 얼굴에 핀 주근깨 크기만큼의 실망도 느끼게 되었다. 법관이 헌법에 명시된 대로 양심에 따라재판을 해야 하듯이 번역자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빠짐없이 옮겨야 한. 사실 문학작품의 번역 앞에 완벽한이란 관형사를 쓸 수 없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 해체이후, 인간은 각자의 지역에서 다양한 언어로 세상을 읽고 이해해 왔다. 그러므로 번역의 역사는 오역의 역사이고 번역의 발전이란 따라서 오역을 최소로 줄이는 데 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일러스트 이방인>은 김화영 선생이 기존에 번역했던 <이방인> 판본에서 오역이 최소로 줄었으니까. 그러니 문학 애호가들이여, 이 책을 사서 읽어라. 그리하여 이 작품의 페이지마다 묻어 있는 지중해의 부조리한 햇살을 느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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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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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절판본에서 부활한 문학동네의 <롤리타>

 

  시간은 인간의 몸뿐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을 사포처럼 갈아대는 모양이다. 나보코프의 이 작품을, 나는 10년 전에 민음사에서 발행한 <롤리타> 사서 두어 번 읽었다. 그 책은 지금 내 방 서가에 꽂혀 있다. 겨우 두 번 읽었을 뿐인데도 10년이란 세월과 서너 번의 이사 덕에 책 표지가 너덜거렸고 페이지에 더러 얼룩이 찍혀 있었다. 오늘, 며칠 전에 예약 주문했던 블라드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가 배달되었다. 기쁜 마음에 포장지를 뜯었다  

 

 독서하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았던 시절인 10여 년 전, 나는 민음사가 출간한 <롤리타>를 처음 읽었다. 그리고 나는 대기 밖에서 산소를 탕비해버린 우주선 속의 비행사처럼 이 작품에 박힌 활자에 질식해버렸다. 나는 문장의 읽다가 미로에 갇혀 버렸던 것이다.

 

 난해한 문장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한없이 아름다웠던 <롤리타>의 문장에 내가 취한 탓이였다. <롤리타>의 문장은 부드럽고 우아했다. 길거리에서 미끈하게 드러낸 여자의 예쁜 다리를 훔쳐다보다가 방향 표지판에 얼굴을 부딪치고마는 얼간이처럼, 나는 이 아름다운 문장에 몸서릴치다가 번번이 스토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롤리타>에서 나보코프가 표현한 텍스트는 산문이 추구할 수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롤리타>는 나보코프가 쓴 미문의 정점에 놓여있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영어를 안다고 모두가 이 작품을 번역할 수는 없다

 

 10년 전 민음사 본을 구매하여 어렵사리 완독한 뒤, 이 작품의 원본을 읽을 결심을 했고 나는 곧장 구매했다. 하지만 원서를 읽는 건 번역본을 읽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웠다. 단문으로 직조된 해밍웨이와 문장과는 달리 중의적이고도 복잡한 수사로 가득한 나보코프의 문장을 읽기엔 내 영어 실력은 너무 얕았다. 나는 독서 도중에 포기했다.

 

 나보코프의 작품을 원어로 읽지 않는 한, 독자는 번역자의 기량에 기대게 된다. 김진준 씨가 옮긴 이 버전이 제대로 번역된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확담할 수 없다. 원작을 손에 쥔 적 있었으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독서 중에 접었으니 원작과 번역본을 대조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한 시간 남짓 속독으로 100페이지를 읽고, 기억을 뒤적거려 민음사 본과 비교해봤을 때 문학동네(김진준 옮김) 번역본은 읽을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이 버전을 완독하지 않고서도 리뷰를 자신 있게 썼다.

 

 

원작에 앞서 영화를...

 

 독서도 우리 삶의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종목이다. 지금과 달리 독서가 단지 음악감상과 함께 내 이력서 나의 취미’로 기재되던 시절, 민음사 본을 사서 100페이지를 읽는 데 일주일이 더 걸렸다. 추정이긴 하나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이 번역본을 단지 세간에 떠도는 저자의 명성만 믿고 구매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500페이지를 조금 더 넘긴 분량이지만, 적어도 5년 이상을 매일 하루 최소 4시간 이상 온전히 독서에 받쳐온 독자가 아니라면, 이 작품을 완독하기 힘들다. 그만큼 이 작품은 난해(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오해하는)하다.

  그런 분들에게 우선하여 영화를 볼 것을 권한다. <롤리타>는 영화로 두 편이 제작되어 있다. 명장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1962년 작과 제레미 아이언스가 험버트 교수로 나오는 1997년 버전이 있다. 거두절미하고 에이드리언 라이 감독이 연출한 1997년 버전을 보기 바란다. 나는 다섯 번 이상 봤는데도 지루하단 생각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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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완역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형규 옮김 / 누멘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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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냥 방어했을 뿐이다.

 3년 전에 나는,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앞으로 10년간 새해 첫달에는 <카라마조프가 형제(통칭)>를 읽는다.”라고 느닷없이 선언했다. 그리하여 재작년에 민음사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작년에 열린책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그리고 올해는 누멘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었다.

 

 하지만 올해는 약속을 지켰다기보다는 그냥 방어했다는 표현이 옳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에 새겨놓은 서사와 플롯과 문체를 두 번이나 체험했기에 이번에는 정독하지 않고, 다른 책을 읽는 도중에 책갈피를 끼우듯 틈틈이 읽었다.

 

 물론 작가가 이 작품에서 추구하는 세계를 맛보았는가는 질문에는 자신이 없다. 완역본으로 세 번 읽었지만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 작품의 서사는 우주적인 규모다. 캐릭터도 다양하고 그들이 엮인 스토리의 시퀀스 또한 다체롭다. 에피소드 하나가 그 자체로 완결된 단편소설이거나 중편소설이다. 출판사는 다르지만 그래도 이 작품(의 번역본)을 되풀이해 읽다 보니까, 작가가 이 작품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백분율로 봤을 때, 이해의 수치는 약 40퍼센트까지 치솟았다고 믿는다. 아마도 내년이면 조금 더 올라가겠지(그러길 몹시 바라고 있다).

 

 금년에 박형규 씨의 번역으로 읽은 누멘 본은, 민음사 본과 열린책들 본보다 더욱 자연스럽게 읽었다. 문장은 매우 깔밋했다. 페이지 하단에 각주를 어지럽게 달지 않고도 독자가 책을 읽다가 의문이 드는 문장에 적절한 길이의 주석을 달았다. 따라서 누멘 출간본은 보다 더 쉽게 까라마조프가의 난폭한 세계로 독자를 이끌고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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