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이방인>은 매력이 풍부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 편재한 햇살의 느낌은 우울할 때마다 어서 이 작품을 펼쳐 읽으라 유혹한다. 흐린 날에 읽더라도 이 작품을 펼치면 나는 거기에서 따뜻한 기운을 느낀다. 1940년대 알제의 풍경, 싱그러운 지중해의 여름, 남루한 서민 아파트, 허름한 레스토랑, 맨땅의 먼지와 소문마저 쓸고 가는 전차와 전차 속을 꽉 채운 남루한 옷차림의 알제리인들...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고즈넉한 이미지들이 이 작품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 꽉 차 있다.

 

  바로 그 <레트항제/이방인>가 금년에 또 출간되었다. 나는 샀다. 이로서 내방 서가에 '이방인'이 하나 더 늘었다. 번역자는 불문학자 김화영 선생이다. 따라서 이 판본은 김화영 선생의 이름이 박힌 책세상/민음사 판본의 번역 텍스트와 동일할 것이다.


 외형은 변했다. 판형이 사방으로 늘어졌다. 제목 앞에 일러스트라는 관형어가 붙었다. 텍스트에 그림을 입혔다는 말이다. 저자 카뮈의 이름 다음으로, 호세 무뇨스의 이름이 박혔다. 원작 제목 앞에 붙은 관형어와 저자 뒤에, 번역자 앞에 박힌 화가의 이름으로 이 작품은 텍스트에 준하는 의미가 있다는 뜻을 암시한다.

 

  작품을 몇 페이지 넘겼다. 담배를 꼬나문 중년사내가 내 시선에 날아와 박힌다. 사내의 표정은 어둡다. 호세 무뇨스는 세상의 독자들이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뫼르소란 캐릭터를 이렇게 표현했다. 호세가 그린 뫼르소의 그림에 내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들이댄다. 사내의 얼굴은 반항하는 제임스 딘을 코스프레한 젊은 시절의 작가와 닮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호세가 그린 뫼르소의 이미지는 릭 브레인을 판화로 찍어낸 것 같다.

  

         릭이라고? 무슨 릭?

 

 마이클 커티즈 감독이 1944년에 연출한 헐리웃 영화 <카사블랑카>, 싱글남 릭 브레인(험프리 보가트 역)이다. 그러고 보니, 본문 6페이지의 그림도 어쩐지 아랍스럽다 했다. 하지만 이방인의 공간 배경인 알제는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 있고, 릭의 소유한 술집이 위치한 카사블랑카는 모로코에 있다. 모로코가 바라보는 바다는 대서양이다. 그러니까, 효세가 그린 그래픽노블을 보고 뫼르소가 알베르 카뮈를 닮았느니, 험프리 보가트를 닮았느니 하고 추측하는 건 하찮다. 중요한 건 그림이 아니라 텍스트다!

 

 내가 읽은 판본만 놓고 말하자면 국내에서 <이방인> 번역한 분은 단 세 사람뿐이다. 이휘영 선생(문예출판사)과 이기언(문학동네) 그리고 김화영(책세상/민음사)선생이다. <일러스트 이방인>이란 제목으로 책세상에서 출간한 이 판본의 역자도 김화영 선생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텍스트에 호세의 그림만 얹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택스트를 읽으니, 역자는 책세상/민음사 판본과 같으나, 내용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원문을 예로 들자. <이방인>의 프랑스어 원본 첫 문단은 이렇다.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 J’ai reçu un télégramme de l’ssile: <<Mere décédée. Enterrement demain. sentiments distingués.>> Cela ne veut rien dire. C’était peut-être hier.

   

  몇 개의 부사를 제외하면 모두 독립절로 구성된 아홉 개의 문장(이중에서 문장 세 개는 명사로 연결된 토막글이다)<알베르 카뮈 전집 특별판>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알베르 카뮈 전집 특별판> 책세상 2010 2, p446.

 

  이 번역이 <일러스트 이방인>에서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김화영, <일러스트 이방인> 책세상 2013, p7

 

  미묘한 차이라서 바뀐 단어가 눈에 안 띨 지도 모르겠다우선 <알베르 카뮈 전집 특별판>에는 번역이 누락된 ‘je ne sais pas(주 느 사 빠/나는 모르겠다)’에 해당하는 문장이 <일러스트 이방인>에는 표현되었다. 그리고 sentiments distingués에 해당하는 표현이 경백에서 근조로 바뀌었다.

 

  법원이 재심사건을 심리할 때 법관(대법원 판사)들은 기존의 판결을 배척하는 (새로운)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법원 조직이 매우 보수적인 헌법기관이란 점도 작용하지만 수 십 년 전에 내린 선배법관(조상님 같은 법관)이 결정한 판결을 후배법관(손자뻘 되는)이 깨트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례는 쉽게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작년 인혁당 재심사건의 새로운 판결은 우리사회에 매우 중한 파장을 던진 것이다).

 

  단순히 출판사가 위탁한 번역자가 아니라, 학계에 몸담은 학자가 번역한 문장도 그런 모양이다. 올해 일흔 셋인 김화영 선생은 세계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알베르 카뮈 연구자다. 이런 김화영 선생이 원문에 있으나 번역본엔 빠진 je ne sais pas에 해당하는 표현을 이제야 채워 넣고 sentiments distingués경백에서 근조로 표현을 바꾼 것은, 김화영 선생이 <이방인>을 처음 번역한 이후 금시 뿐이.

 

   경백근조로 바꾼다고 의미가 달라질까? 누락된 문장은 채워야 하는 게 번역자의 당연한 책무가 아닐까? 대관절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김화영 선생은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까? 내가 아는 한 sentiments distingués경백으로 처음 번역한 분은 이휘영 선생이다. 이휘영 선생은 국내 최초로 <불한사전>을 편찬한 우리나라 1세대 불문학자이고 <이방인>을 국내(와 아시아) 최초로 번역한 분이다. 이휘영 선생이 번역한 <이방인>의 첫 문단을 보자.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온 것이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

  그것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휘영 <이방인> 문예출판사 p9

 

  이로써 우리는 김화영 선생의 <이방인> 번역이 어디에 근거를 두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 김화영 선생은 아마도 이휘영 선생의 카리스마(동양 최초 번역이라는)에 눌렸거나, 선배 학자의 번역 스타일을 깨트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김화영 선생을 존경하는 하면서도 얼굴에 핀 주근깨 크기만큼의 실망도 느끼게 되었다. 법관이 헌법에 명시된 대로 양심에 따라재판을 해야 하듯이 번역자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여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빠짐없이 옮겨야 한. 사실 문학작품의 번역 앞에 완벽한이란 관형사를 쓸 수 없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벨탑 해체이후, 인간은 각자의 지역에서 다양한 언어로 세상을 읽고 이해해 왔다. 그러므로 번역의 역사는 오역의 역사이고 번역의 발전이란 따라서 오역을 최소로 줄이는 데 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일러스트 이방인>은 김화영 선생이 기존에 번역했던 <이방인> 판본에서 오역이 최소로 줄었으니까. 그러니 문학 애호가들이여, 이 책을 사서 읽어라. 그리하여 이 작품의 페이지마다 묻어 있는 지중해의 부조리한 햇살을 느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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