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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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편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실존 인물 백석을 주인공으로, 백석이 북에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57년부터 선전 아동시를 게재한 뒤 절필한 62년까지 그가 시인으로 살았던 마지막 7년의 행적을 그렸다.

김연수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일들은 소설이 된다고 믿”는다고 썼지만, 나는 이 소설 속에서 보여진 마음들과 어떤 선택들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백석이 어느 하루 자살을 하게 되는 여인과 불타는 집을 보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나 뜨거움과 느꺼움을 동시에 느끼는 일은 있었겠노라고, 멀리 이국에서 온 시인과 조선어로 ‘비’와 ‘바람’ ‘바다’를 발음한 일은 없을지도 모르나 제 마음에서 벽돌 조각처럼 부서지는 단어들을 몰래 적고 아침이 오기 전에 불태운 일은 있었겠노라고.

책을 읽는 내내 줄리언 반스의 소설 《시대의 소음》 이 떠올랐다. 그 소설 역시 스탈린 치하 전체주의 체제에서 예술가로서 고뇌했던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삶을 다루고 있다. 해당 작품에는 다음 문장이 나온다.

[예술은 모두의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모든 시대의 것이고 어느 시대의 것도 아니다. 예술은 그것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것이다.](《시대의 소음》 중에서.)

권력과 영합하지 않는 독립적인 예술을 지지하는 위 문장은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백석이 ‘조선인민군은 항일 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읽다 자문하는 장면과 겹친다. 백석은 사랑과 적개심, 광기와 같은 모든 감정을 자신이 써내려간 문장 속에서 이해하던 사람이었다. 즉, 시를 쓰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인이었으나 당과 수령을 위한 시 앞에서는 차마 펜을 들 수 없었다.

전쟁의 광기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구원한 그 언어와 문자들의 주인은 누구일까? 기행은 궁금했다. 그것은 자신의 것인가, 당의 것인가? 인민들의 것인가? 아니면 수령의 것인가?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비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책을 완독한 뒤 백석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를 연달아 읽고 있다. 백석의 시와 소설 속 장면이 겹치는 부분이 꽤나 많다. 삼수 독골 축산반 사무실에서 백석이 갈탄 난로에 의지하다 편지와 시를 쓰는 모습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머물던 그같고, 옥심과 함께 불을 바라볼 때에 백석이 떠올리는 ‘높은 시름이 있고 높은 슬픔이 있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마음’은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한 문장을 고스란히 따왔기에 더욱 벅차다. 가장 첫 시는 역시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시를 읽는데 백석의 앞에서 이를 외던 소설 속 서희가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우뚝 서있는 풍경이 자꾸만 그려졌다. 쇠도끼 날처럼 백석의 머리통을 내리치고, 그를 눈이 푹푹 나리는 밤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에 옮겨놓은 시. 나는 이 풍경을 상상하면 불타는 집과 천불에 휘말린 숲을 보는 백석이 된 것마냥 가슴이 은은하게 뜨겁고 느꺼워진다.

서희가 시 외는 장면과 더불어 가장 좋았던 장면은 소련 시인 벨라가 함흥 서호진의 비 내리던 밤 백석에게 시인의 일을 말하는 장면이었다. 본인 역시 시를 썼던 사람이며 자신의 단어는 부서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백석에게 그녀는 죽음과 전쟁, 상처의 의미를 되새긴다.

["나는 1924년에 세상에 태어났고, 그 세상에는 늘 나보다 면저 죽는 것들이 있었어요. 내게 전쟁이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는 일이었어요. 전쟁은 인류가 행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일 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따라서 나는 이 책을 눈 냄새와 비 냄새가 나는 소설이라고 기억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선 서로의 마음 사이 심연을 건너기 위해 주인공들의 대사마다 물 냄새가 났다면 이 책은 눈 냄새와 비 냄새로 정의하고 싶다. 습기 가득한 꼿꼿한 마음에도 압력과 폭력은 불을 질러댔지만, 시인의 생애는 이를 지켜보고 버티어낸 갈매나무처럼 보인다. 백석의 시를 읽는 동안 두고두고 슬플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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